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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28. 2024

정중하게, 평화를 말하는 동화

장주식, 『좀 겁 없는 친구 두두』, 문학동네, 2024

* 쪽수: 96쪽



장주식의 신간 『좀 겁 없는 친구 두두』를 읽었습니다. 『좀 웃기는 친구 두두』의 후속작이고요. 아마 여기서 끝나진 않을 것 같고, 꽤 긴 시리즈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어린이를 매우 정중하게 대하는 작품입니다. 동화에서 이런 태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종종 동화는 좀 유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한 작품들을 보게 되는데, 어린이 독자에게 심각한 결례입니다. 세상에 어떤 어린이도 유치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지는 않거든요. 어린이는 자기를 정중하게 대하는 어른과 그렇지 않은 어른의 차이를 아주 잘 알아봅니다. 동화도 마찬가지겠지요.


『좀 겁 없는 친구 두두』의 '두두'는 검은 고양이입니다. 엄마아빠에게 '너무너무너무 중요한 일이 생겨서' 흰바위마을 여름 축제에 갈 수 없게 된 '루아'에게 두두는 말합니다. "가자고. 나랑 가면 되지." 인간인 루아에게 이 말은 다소 황당하게 들립니다. 흰바위마을은 차로 15분, 걸어가면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거든요. 게다가 중간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엔 멧돼지와 뱀, 부엉이, 심지어 호랑이까지 나온다고 하죠. 하지만 두두는 그런 얘길 다 듣고도 여전히 의기양양합니다. "하하하. 무서워하는 사람한테나 무서운 거야. 나만 따라와. 내가 데려다줄게." 두두의 말에 용기를 얻은 루아는 서둘러 길을 떠날 채비를 합니다.


여기까지가 첫 챕터 「걱정 마, 나랑 가면 되지」의 내용입니다. 부모의 현실에 일방적으로 묶여있던 루아의 세계가 두두를 통해 처음으로 독립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모험이 시작되는 거죠. 즉 이 이야기에서 루아의 모험은 어린이의 세계를 그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른의 세계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현실에 대한 반론으로서 첫 번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동화가 취하는 다분히 정형화된 방식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주인공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모험은 동화의 독자들에게 그다지 낯선 풍경은 아니죠. 이 작품에서 보다 특징적인 장면은 그 뒤에 펼쳐집니다. 두두와 루아는 흰바위마을로 가는 길에 고라니와 멧돼지와 오소리를 만나고, 그때마다 무언가 잘못을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하죠. 진심 어린 사과 이후에는 마법처럼 평화가 찾아듭니다.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점은 이렇듯 일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과정들을 더없이 소중한 순간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덧 산 정상에 다다른 두두와 루아는 그곳에서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굉장히 정중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지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 지점에 등장하는 이 신사적인 호랑이는 어쩌면 작품의 전체적인 톤을 표상하는 신화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두두와 루아에게 비 피할 장소를 안내하고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하늘에는 무지개가 뜨고, 두 친구는 흰바위마을로 가는 내리막길로 접어듭니다. 작품 속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배치가 익숙한 스토리라인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네요.


훌륭한 결말을 가진 작품입니다. 전 읽으면서 내내 루아가 어떻게 집에 돌아올지를 걱정했어요. 산 넘어 두 시간 거리인데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일을 겪었으니 실제론 더 오래 걸렸겠죠. 문제는 그 거리를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현실적인 걱정이죠. 하지만 이야기는 그런 걱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방식으로 매듭지어졌고, 전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제가 필리파 피어스Philippa Pearce의 『학교에 간 사자Lion at School』를 좋아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간 사자』에 실린 작품들은 어른의 질서나 정서에 전혀 구애받지 않거든요. 「무지무지 잘 드는 커다란 가위」 같은 작품을 보세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집은 어린 주인공의 가위질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됩니다. 어른 입장에서 이건 정말 공포스러운 사건인데, 과연 어린이의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매우 정중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중 어느 것도 시시하거나 유치하게 묘사되지 않았어요. 잘못한 사람은 있는데 미안한 사람은 없는 상황이 갈수록 많아지는 요즘, 이런 작품을 통해 정중한 평화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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