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내게 한 짓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무명인데 왜 쓰세요?
웹툰 글작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보통 감탄과 함께 네이버인지 카카오페이지인지 물어온다. 마치 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삼성이냐고 묻고, 배우라 하면 유명 누구누구를 본 적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연재처의 금요 1위, 토요 1위 작품을 아는지, 그 사람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내 벌이는 또 얼마나 되는지 물어온다. 다들 그렇게 건물을 사고 그러는지.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면 조금 전까지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이 썰물 지듯 빠져나가고 새로운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 눈동자는 매번 ‘그럼 그렇지, 그 정도 되는 사람이 뭐 하러 여기 있겠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하는 게 뭔지 빤히 알지만 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기대에 맞추려 내 현실에 약을 치고 사돈의 팔촌까지 끌어들여 온 세상 사람들이 알 만한 유명작가들의 이름으로 어깨 뽕을 채우기도 싫다. 안타깝지만, 나도 기안84를 딱 〈나 혼자 산다〉를 통해서만 안다. 아는 것을 모두 그러모아 남루한 아는 체로 기대를 채워줬다면 사람들은 채 삼십 분도 안 되어 더 유명한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물어오는 것은 연재처와 수익이다. 간혹 뭘 쓰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주로 어디에 썼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연재처와 수익으로 돌아간다. 작가라는 낯선 영역에 대한 보편적인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만큼 폭이 한정적이다. 무명의 내게 왜 쓰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두 편의 웹툰을 완성했지만 작가의 말도, 작가 후기도 쓰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내게 물었다. 대체 왜 쓰지? 나는 주로 상상하고 싶어서/상상을 참을 수 없어서/상상하고 있을 때 가장 살아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해 쓴다.
상상이 내게 한 짓
그럼 도대체 상상이 내게 무슨 짓을 했을까?
이야기 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것에 완전 꽂혔던 나는 2011년에 한예종 극작과에 지원했다. 동시에 에버랜드 3) 호러메이즈에서 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체 실험하는 수술실의 썩어가는 개수대 아래 구멍에서 기어 나와 지나가는 사람의 발목을 어루만지는 역을 맡았다. 기괴한 모습으로 생각지도 못한 데서 나와 발목을 만지니 하이힐에 무자비하게 밟힐 때가 많았다. 보호장구를 껴도 왼손이 너덜너덜해졌다. 다음 관객이 들어올 때까지 뜨는 시간은 약 1분. 1분은 한 문제를 풀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재빨리 안으로 기어들어가 대기 동선의 희뿌연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손전등에 의지해 문제를 풀었다. 극작과 전문사 시험은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그만큼 간절했다.
스윽, 비비적비비적, 키아악!! 슥슥, 정답 체크!
스윽, 비비적비비적, 꺄아악!! 죽어 버려!! 슥슥, 정답 체크!
상상을 다듬는 방법을 배운다는 기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매캐한 시체 썩은 내를 딛고 4) 1차 합격을 안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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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러메이즈는 일본의 미궁 설계 전문가를 동원한 리얼한 귀신의 집이다. 시체 썩은 내를 담은 방향제가 곳곳에서 주기적으로 치익-치익 분사되고 천장에서는 핏물로 오해할 섬뜩한 물방울이 똑, 똑 일정하게 떨어질 만큼 섬세하게 디자인되었다.
4) 면접에서 배우와 작가 둘 중 양자택일을 하라는 황당한 질문을 받아 머뭇거리다 떨어졌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학원에 버금가는 전문사 시험에 야상을 입고 갔다든가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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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나를 살린 적도 있다.
작가가 되기 전 나는 무명 배우였다. 당시에도 연극 대본을 썼고, 여러 시나리오 공모전을 준비했지만 배우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배우로서 성장하는 것과 배우로 벌어들이는 수입 간의 간극이 점점 커졌고 연이은 공모전 실패 때문에 내적 갈등이 일어나자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다 2014년 늦가을, 국제적인 영상 제작사에 취직했다. 이즈음 홍콩, 프랑스 등지에서 연기와 연출을 했고 일본의 소규모 영화제에 참석했으며 기획 PD 면접도 계속 보러 다녔기에 뜬금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홍콩과 필리핀에 지사를 가지고 있는 국제적 드라마, 영화 제작사라 했는데 배우, 연출, 기획, 극작에 두루 관심이 있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인턴은 일단 필리핀 지사에서 일해야 했다. 인턴 1년을 채우면 원하는 지사나 본사에 지원할 수 있다고. 삶이 날다시피 뛰어가는 줄 알았다.
겨우 한 달 반 만에, 나는 날다시피 뛴 것이 아니라 폭탄이 투하되어 황폐하게 된 땅바닥에 처박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제적인 제작사라던 S.P필름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함께 있던 13명 모두 취업 사기를 당한 것이다. 대표라던 사람은 연쇄 사기꾼이었고 투자라는 명목으로 대출도 알선했다. 경찰서에 구속해 놓았지만, 그의 머리엔 이미 경찰을 매수할 계획도 있었다. 사기 친 돈을 이용해 지역 양아치들하고도 연을 맺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의 뒷배가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말에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알아볼 것이라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공포감, 어디선가 총알이라도 날아들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포감에 조서 쓰는 이틀을 버티는 것도 힘들었다. 살고 보는 게 먼저였다.
탈출하다시피 한국으로 돌아온 후엔 좌절할 시간이 없었다. 밤낮으로 아르바이트하느라 잠잘 수 있는 시간이 다섯 시간가량밖에 되지 않았지만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글로 썼다. 정황 증거를 객관적 시선으로 하나하나 나열할 수가 없어 다큐멘터리나 르포를 쓸 수는 없었다. 흥분과 열정, 비참함, 처참함을 반죽해 이 사기꾼을 어떻게 극에서 망가뜨릴까에 울다 웃으며 16부작 미니시리즈로 기획했다. 완결을 보진 못했지만 약 3개월, 빚을 갚아야 다시 살 수 있다며 이를 악문 시간 동안 나를 살린 건 하루 1~2시간의 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