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라는 하는데요, 많이 읽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 본 작품은 2021년 7월 31일 출간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포춘 쿠키)에 실린 9편의 에세이 중 "제가 어떻게 하면 뽑아주시겠어요" 부분을 출판사 허가하에 연재한 것입니다.
* 본문의 주석은 번호와 밑줄로 표기한 후, - 구분자를 이용해 출판사 버전을 간소화하여 실었습니다.
나는 책을 소유하는 데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시간이 없어서, 이해력이 낮아서, 내용에 동의할 수 없어서 등 책이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책이 창작자의 창의성을 방해한다는 통설 때문이었다. 책은 점점 쌓이는데 한 달에 1~2권밖에 읽지를 못하니 자리만 차지하고 그마저도 읽는 동안 딴생각하는 나를 깨달았을 땐 책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2016년 겨울부터 2019년 봄 무렵까지, 나는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었다. 그간의 낙담, 그간의 감정적 동요, 그간의 불합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낮이고 밤이고 과거의 나쁜 기억이 반복되어 약 10개월 정도 매 순간을 울며 지냈다. 나쁜 생각 하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아무리 의지를 다잡아도 소용없었다. 점점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고 당시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었다. 극단적 불면과 우울에서 조금 벗어나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선뜻 다시 삶으로 한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집에 있던 400여 권의 책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도서관을 찾아 무턱대고 이 황당한 상황에 답을 줄 만한 책을 찾아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방법이 바뀌지 않아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다. 10권쯤 빌리면 한두 권 읽는 정도에 그쳤다. 일도 하지 않을 때였는데 시간이 있다고 읽히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다양한 시도를 한 지 벌써 4년여, 지금은 한 달에 책 12~15권, 웹툰 60~100화 정도를 보고 있다. 요즈음은 일도 하고 함께 사는 강아지, 고양이 식구가 세 마리나 되는 걸 고려했을 때 확실히 이전보다 시간 활용이나 책 선택에 틀이 잡혀가고 있다. 이제 앞서 가졌던 두 가지 이유에 반박할 수 있다. 첫 번째, 내가 이해력이 낮은 것이 아니라 읽히지 않았던 그 책이 나와 맞지 않았던 거다. 지금은 나와 맞는 책을 만나기까지 읽다 만 책들에 대해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잘 맞는 책을 만나게 되면 술술 읽히니까 없던 시간도 생긴다. 8) 두 번째, 책이 창작자의 창의성을 방해한다는 설도 있다만 내 경우에는 책이 나의 세계관을 풍부하게 하더라. 추리소설계에선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가 다 했다는 말도 있고, SF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땐 〈블랙 미러Black Mirror〉가 다 해서 할 게 없다는 불만도 들었다. 그렇다면 눈 닫고 귀 닫고 살아야 할까? 한때 좀비 콘텐츠는 미국이 다 한 줄 알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킹덤〉이라는 사극 좀비가 나왔다. 답습이 두렵다면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얼마큼 어떻게 볼 것이냐를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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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데즈카 오사무조차도 자신이 창작해야 할 동종 계열의 책, 즉 프로의 만화는 많이 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 데즈카 오사무, AK커뮤니케이션즈,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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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루틴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새로 도서를 구매해도 책 읽기가 늘지 않아 부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이러다 계속 쟁이기만 하다 다 버리게 될까 봐 짜증이 났다. 쓰지도 않으면서 남 주긴 아까운 그런 심정. 엑셀 계통이랑 정말 안 친하지만 눈 딱 감고 소장도서 목록부터 써 내려갔다. 이왕 할 거 제목, 역자, 출판사, 출간연도까지 항목별로 기록했다. 놀랍게도 공짜로 얻은 책과 할인 덕에 산 책들이 꽤 있었다. 이런 책들은 내용에 앞서 일정 가격 폭을 먼저 고려한 티가 났다. 10년을 가지고 있어도 들춰보지 않았던 책들도 있어 황당했지만, 내 책장이 황당한 상태라는 건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소장도서를 정리하고 난 뒤에는 시트를 하나 더 열어 도서관 대여 목록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소장도서와 대여 기록을 합쳐 500권 정도 정리하려니 지겹고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목록을 만들고 나자 얼마나 읽었는지 구분이 필요해 색 표시법을 만들었다.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중에 기억나지 않을까 봐 겁내는 경향도 있다. 누군가에게 “○○○ 작가의 《△△△》 책에 보면 그러잖아, ‘~’라고”라는 말을 들을 때면 늘 상대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처럼 직관적으로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책 내용을 기억해 두기 위한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트에 ‘메모’ 열을 추가하였다.
색 표시법과 메모란이 생기고 가장 좋은 것은 마음에 드는 책들에 대한 기록보다 읽다 만 책과 책장에서 비울 책에 대한 이유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동경하던 시절, 집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다가 중간에 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면 자책한 적이 있다. 이건 예의가 아니야, 라며. 비디오가 IPTV로 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좋아하는 태도 역시 같았는데, 책을 읽다가 다 읽어내지 못하면 나 자신이 그렇게나 무능하면서도 예의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그간 타인을 동경하느라 내 취향과 필요를 알 기회를 놓친 것이다. 처음에는 표시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을 뿐인데 3년 치 가량 모이니까 나의 특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취향이 보이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주로 어떤 결인지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