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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Nov 20. 2024

#03 「아메리칸 뷰티」③

그것은 자유와 독립의 소리였다.

* 너무 길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회차 분할합니다. 앞으로는 미리 글자수와 가독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업로드하겠습니다. 3화로 분할할 예정입니다. 일부 문장부호와 단어도 손 보았습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선정영화 : 「아메리칸 뷰티」(1999)

― 장르 : 드라마, 블랙 코미디

― 선택한 등장인물 : 바바라 피츠 / 성공한 미국 중산층 가족을 이웃으로 둔 가정주부.

― 초고 완성 시기 : 20240714


* 이 작품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재구성된 소설로,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거나 재미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실 예정인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서 '보러 가기'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764662&qvt=0&query=%EC%95%84%EB%A9%94%EB%A6%AC%EC%B9%B8%20%EB%B7%B0%ED%8B%B0



“Wives, be in subjection to your own husbands.”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


내가 부모님 집에서 마지막으로 자던 날, 어머니가 내 머리맡에서 내 손을 잡고 해줬던 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subjection, subjection. 순종, 순종.      


나는 이 말을 되뇌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일어날 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를 일으켰다. 그것이 수용인지, 저항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침대로 가서 눈을 감았다.      


잠은 쉼이고 안식이다. 잠은 신이 허락한 죽음의 모사다. 자자.     


나는 잠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귀는 더 밝게 트였다.      


잠시 뒤, 현관문을 살그머니 여는 기척이 들리고 이윽고 이 층에서 쿵하는 소리와 남편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 층으로 가려다 말고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이 떨려서 문고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계단으로부터 울려와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뒤를 무거운 짐을 진 듯한 발 끄는 소리가 따라왔다. 곧 그 소리마저 현관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누가 다시 들어오지는 않는지 현관을 주시하면서 살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들 방에는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 모니터로 재생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 가득, 상의를 벗고 운동하는 남자를 본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스터 번햄.      


그는 옆집 남자였다.      


이로써 아들의 행방은 알 수 없어도, 남편의 행방은 명확해졌다.     


“Let the day perish wherein you were born, and the night in which it was said, there is a man child conceived. Let that day be darkness; let not …” (Job 3:3-4)     

“네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를 배었다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 그날이…” (욥기 3:3-4)     


나는 모니터에서 캠코더를 뽑아 들고 집 밖을 나섰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발을 해치며 행여 캠코더가 잘못될까 봐 외투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입안에서는 계속 남편을 저주하는 말들이 맴돌았다. 하늘에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도, 심지어 우리의 성혼을 선포하던 목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저주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옆집 차고였다. 나는 뒷마당에 몸을 숨기고 캠코더만 품에서 꺼내 차고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      


남편은 벌써 옆집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찍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걸로 무얼 하려는 걸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저 찍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간 말하지 못했고, 덤벼들지 못했고, 벗어나지 못했다. 그 시간이 이십이 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손에 넣으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이 키스했고 옆집 남자가 남편을 밀어냈다. 언제나 모든 게 각이 져 있던 남편은 어느새 오그라든 채 발걸음을 돌렸다.      


연민이 들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캠코더를 들고 있던 팔에 힘이 빠졌다.      


남편은 옆집을 마당을 돌아나와 터벅터벅 우리 집 현관문 쪽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괴로워 보였다. 내가 그라도 이 순간만큼은 괴로울 거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강하게 저주를 읊었다.      


「네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네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취향은 폭력의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건 남 얘기가 아니다. 흐린 기억 속으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발생한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목숨에 관한 것이다. 도피하고 도피하다 어느 날 눈 떠보면 천국에 가 있는 인생 따위 원하지 않는다.      


남편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둠 속에 몸을 더 깊숙이 숨긴 채 그의 발걸음을 계속 찍었다.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다시 나왔다. 


철커덕.      


나는 이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콜트 45의 슬라이드를 뒤로 당겼을 때 나는 소리다.      


남편은 갑자기 빗속으로 뛰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폭우를 헤치고 나는 급하게 그를 쫓았다. 이미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열려있는 차고를 통해 옆집 내부로 들어갔다.      


옆집 남자는 식탁에 앉아 가족 사진이 든 액자를 들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 뒤통수를 남편이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편을 향해 렌즈 방향을 돌렸다.

      

탕!      


남편은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치도 오차도 없이. 그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선혈만이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휘리리리릭.      


테이프 감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것은 자유와 독립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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