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 앞에 놓인다. 나는 그 길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던 것들만 선택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남들이 다 말렸던 자퇴를 했고, 20대 초반에는 작가를 꿈꿨으나 포기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며 반대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뒤늦게 대학교에 들어가 취직을 했으나 회사 역시 고작 '일 년 살이'의 연속.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내 선택의 결과로 인한 대인기피증과 무기력증, 우울증으로 힘들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게 과정이 되듯 과거의 일은 미화되어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난 뒤부터 난 늘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망가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그때에는, 삶을 멋들러 지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키워가기도 했으니까. 참 못난 삶을 살았기도 하다. 열등감과 무기력증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끊임없이 삶을 선택하고 책임을 다하는 일이었다. 나는 시작은 쉽게 하지만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다. 용두사미인 격이다. 디테일한 부분을 잘 챙기지 못한다. 이런 무수한 단점들은 일부 내 선택의 척도가 되기도 했지만, 했던 선택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긴 했지만 그 선택들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고, 더 좋은 기회들을 놓치기도 했다. 내가 더 좋아서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선택은 늘 어려웠다.
글을 직업으로 삼는 삶을 포기하고 나서부터 뭔가를 잃어버린 듯 한쪽 구석이 공허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던 건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토해내듯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쓰지도 않았다. 나는 계속 소설을, 시를, 글을 짝사랑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렇게 견뎌왔던 것뿐이다.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처럼, 난 그냥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어야 했다. 도망치듯 선택한 일에서는 계속 어긋나기만 했다. 일 때문에, 사람 때문에 그리고 나 자신 때문에 힘들어할 때쯤 나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회사를 나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를 '완전히' 나오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도 선택에 대한 것이다.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처음 회사를 나왔을 때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소속되어 있던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라는 길을 선택하긴 했지만 과연 그 선택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 무던히 고민했다. 20대 때는 삶이 항상 불안하다고 생각했었고 막연한 불안감을 없애는 게 내 인생의 사명처럼 느껴졌다.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 해, 이제껏 너무 불안하게 살았으니까.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선택들을 했으니까. 이런 강박을 가져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더 불안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나름의 안정을 찾게 된 건 온전히 불안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가 불안해서, 남들의 눈치가 보일까 봐, 하지 않으려고 피해왔던 선택들을 안정적이지 않아도 괜찮으니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겠다고 선택한 순간, 더 이상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회사를 떠나 계속 글을 쓰겠다고 선택한 것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그 어떤 것이든 선택은 어렵지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지금 내 선택의 원동력은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 내가 사랑하는 일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