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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Dec 20. 2020

영화 <파이란>

파이란(장백지)에게 있어서 <파이란>은 얼마나 폭력적인 영화인가? <파이란>이라는 영화의 비극성은, 파이란 자신이 일종의 자동인형처럼 묘사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파이란은 최민식의 상상 속의 '그녀(3인칭)'일 뿐, 실재하는 여성이 아니다. 도대체 왜 파이란은 이토록 무능한 남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왜 감독은 자신의 무의식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작품의 비극성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사실 비극이란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것(일상)들을 길들이려는 인간의 헛된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비극적인 죽음 자체가 하나의 개념인 것은 아닐까? 현실과는 무관한 어떤 개념. 그런데 개념 이전에 현실이 가능할까? 오히려 현실은 개념이라는 틀을 통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해 볼 것. 개념화할 수 없는 현실이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개념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그림을 상상할 것. 어떤 철학자에 따르면 최초의 언어는 무언가에 대한 금지(어)이다. 이를테면, '~을 하지마!'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순간에 금지되는 대상('~')은 금지('하지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술어와 목적어에 내재한,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빈 공간이야말로 (이 말의) 화자와 그것을 듣는 청자, 둘 사이의 구조적 위치를 정초한다. 언어의 의미는 바로 이 시점에서, 오직 그것의 무의미를 통과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그 이전에는 화자도 청자 사이의 관계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이런 그림을 상상해볼 수 있다. 얼굴 없는 비인칭적 주어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 그리고 한 명이 발화하자 텅 빈 얼굴에서 단 하나의 표정이 솟아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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