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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Jun 01. 2021

한국 드라마는 불륜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라마 <마인> 리뷰

람들은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 속에는 진정한 사랑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드라마로 회귀하는 것이다.

일상은 반복적이고 지루하다. 진정한 사랑 또는 진짜 사랑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지루함과 반복에 대한 편집증적인 방어이다. 예컨대 결혼생활은 지루하다.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배우자는 가짜 사랑처럼 보이고 새로운 정부는 마치 진짜 사랑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 '사이'에만 존재한다면 어쩔 것인가? 가령 불륜 문학의 최고봉 <이선 프롬>의 후반부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사례가 등장한다. 주인공 이선 프롬은 새로운 정부와 함께 썰매를 타고 하강한다. 엄청난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던 두 사람은 나무에 세게 부딪혀서 이후 불구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이 하강하는 장면에서 좁혀지는 거리는, 나무와 두 사람 사이의 실제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 사이의 간극인 것이고, 작가는 이를 통해 발생하는 끔찍한 결과를 예언한다. 그런데 이것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보다 훨씬 더 교훈적이지 않은가?

정신분석에 따르면 안나는 톨스토이의 무의식이고 레빈은 의식이다. 그런데 왜 안나(무의식)만 죽어야 하는가? 배제당함으로써, 레빈(의식)의 도덕성을 구성하는 것도 바로 안나 자신 아닌가? (따라서 톨스토이는 레빈 또한 기찻길에 던져버려야만 했다)

안나는 진정한 사랑을 불륜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상상한 대상(브로드스키)에 점점 접근할수록 남는 것은 쥐뿔도 없는 것이다.  레빈의 경우 아내 키티에게 프로포즈를 한번 거절당했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내적 간극으로서의 환상이 유지된다. 물론 그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해석하는데, 종교가 환상을 보충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다면 레빈은 과연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한국 드라마가 완결되는 시점은 이처럼 결혼 직전의 순간까지였다. 즉 백마 탄 왕자님과 일반 여성 사이의 계급적 갈등이 드라마의 주요 갈등으로 작동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결혼 이후라는 것이다. 재벌가와 결혼한 평범한 여성은 이후 과연 어떻게 살아갈까?

넷플릭스 드라마 <마인>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청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리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긴장과 갈등은 결혼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이다. 단 더 이상 계급 갈등은 주요 갈등 소재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는 불륜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어떤 맥락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의 주제와도 공명한다. 아사코는 전남친과의 짧은 만남을 갖고 돌아와서 남편 료헤이에게 다음과 같은 뉘앙스로 말한다. 우리 눈 앞에 있는 강물은 더럽다, 그런데 더럽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즉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더 이상 사랑의 주요 테마가 아니다. 오히려 변질되고 오염된 사랑, 때 묻은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해졌다.

우리는 하마구치 료스케처럼 이러한 변화 요인을 정치적인 문제라든가 환경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드라마에서 국한해서 본다면 이런 맥락은 부차적이다. 한국 드라마는 상품이다. 달리 말해서 소비자=시청자의 수효가 없으면 팔리지 않는 상품인 것이다. 즉 순수한 사랑에 대한 낭만은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종류의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과연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예전과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랑을 믿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작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윤리적인 차원이 아닌 감성적인 차원, 즉 예술 전반에 대한 미적인 태도 변경이다. 우리는 더 이상 드라마 캐릭터들에 감성적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화면 속 캐릭터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거리 자체를 즐긴다.

데이비드 조슬릿에 따르면 캐릭터와 아바타는 다르다. 아바타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된 캐릭터와는 달리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외시적 이미지와 내포적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다. "배역이란 절대로 현실이 아닌 역할이기 때문에 완벽히 그릇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더 만족스럽다(...) 아바타는 투사되고 잠정적인 주체성으로서, 텍스트의 안과 밖, 그리고 텍스트에 관해 동시에 존재한다."

아바타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적절한 한국적 사례가 있다면 <무한도전>의 유재석일 것이다. <마인>에서는 정서현(김서형)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캐릭터와 디렉터의 경계를 넘나든다. 얌폴스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네러티브 공간과 디제시스 공간의 '사이'에 있는 셈이다. 예컨대 우리는 <무한도전>을 볼 때 박명수에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박명수를 '보는 것'을 즐긴다. <마인>과 같은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볼 때도 이는 마찬가지다.

#마인 #드라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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