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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Sep 28. 2023

하루키의 리얼리티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중심으로

리뷰

하루키 소설의 리얼리티는 회색지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현실과 가상(‘도시’)의 경계에서 비롯된 이질감이야말로 하루키적 주체를 생산한다. 그러한 이질감은 주인공이 과거에 잃어버린 파편에 대한 모종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너'는 <1Q84>의 아오마메, <색채를 잃은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의 색채=정체성에 대응한다. <노르웨이 숲>에 만연한 정서도 이러한 상실감 아니겠는가. 하루키적 주체는 주체 그 자신의 '기분'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노스텔지어가 60년대 전공투 학생운동 실패 후, 어느 동년배 문예비평가에게 나타났던 해리성 인격장애(자기분열)와 같은 일종의 증상인 것인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라고 썼던 어느 공산주의자의 비관적인 현실 인식에서 기반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하루키의 독자로서 감지할 수 있던 것은 그로부터 느껴지는 매혹, 이율배반으로서 나타나는 불가해한 세계 자체에 대한 매혹이다. 예컨대 하루키는 현대철학의 주제이기도 한 타자성 X를 미적으로 전용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만, 타자성 X를 주체의 외부에 위치시킨 칸트라는 철학자에 반해서.


슬라보이 지제크에 따르면 칸트의 생각과는 달리, 타자성 X, 그러므로 물物자체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 것이기는커녕, 주체의 인식 자체에 새겨진 다다를 수 없는 영점이다. 내게 바깥이라고 여겨졌던 곳이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 하루키의 소설에서 ‘너’의 빈자리가 세계에 대한 '나'의 이질감을 구성하듯이 말이다.


소설 속 ‘나’는 끝내 ‘너’에게 다다를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할 수도 있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통해 '너'가 있는 도시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끝내 ‘너’의 본질에만큼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며(물론  도시에서 '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부재하며, 두 사람이 연인 상태임을 감안할 때 그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로 이 한계가 하루키적 주체에 새겨진 상실감의 작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상실감을 어디까지나 미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다다를 수 없는 소설 속 '너'의 본질은 오히려 다다를 수 없다는 그 이유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데, 하루키의 소설은 이러한 상실의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무언가가 상실되어야만 한다. 상실 없는 노스텔지어가 가능할까. 오히려 주체의 결여야말로 그것의 가능조건이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을 떠나서 오늘날의 현실만 놓고 본다면 상실 없는 노스텔지어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인간의 욕망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욕망하는 대상은 언제나 나에게 '이미' 상실된 것처럼 경험된다. 즉 그 대상(또는 상품)이 나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본질적인 것이라고 느낄 때 나는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품을 정체성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마케팅 기법이기도 하다. 다시 칸트를 인용하자면 칸트의 물자체, 즉 타자성 X로서 상품은 어디까지나 소비자인 나의 외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판매되기 위해서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내적인 파편’으로서 경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액체근대(바우만)의 유체역학적인 세계에서 개인의 바깥과 내면=안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하루키적 주체가 그러한 주체 자신의 정서나 기분과 구별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소설 속 '나'의 행동은 내면적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의 필연성에 의해 이끌리듯이 묘사된다. 마치 충동구매를 하는 소비자의 개별 심리가 다국적 기업의 홍보문구에 의존하듯이 말이다. ‘JUST DO IT’이라는 나이키의 홍보문구는 어디까지나 소비자의 외부에서 그러한 소비자를 타켓팅하는 외적인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그것에 내면적으로 동화되듯 ‘경험한다’ 무엇을? 나이키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을.


선택과 '자유'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기이한 풍경이다. 개인의 선택 이전에  '(상실된)대상 없는 상실감'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감각이 소비 심리를 자극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상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여하한 다른 상품을 포기=상실하는 것과 같다. 즉 상실감은 구매한 상품에 관해서도 (사전에 이미)발생하지만 구매하지 않은 상품들에 대해서도 (사후적으로)발생한다. 이중의 상실이 소비라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란 소비의 시대, 기분의 시대인 것은 아닐까.


Ps.

앞서 말했듯이 물자체에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대상의 상실 자체가 그러한 대상보다도 선행한다는 것. 즉 대상이 주체에게 표상되는 것은 대상의 본질(물자체)이라는 가상의 존재자의 도입을 통해서다. 그것은 실제하는 대상에 예정된 좌표를 부여하는 환상-공간, 주체에게 표상을 작동시키는 일종의 선험적 배경이다. 그리고 본질이라는 '가상태'가 내 눈 앞에 실제하는 대상이라는' 현실태'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이 순간에 대상은 이미 상실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배경은, 따라서 물자체는 어디까지나 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가상은 인식에 있어서 구성적인 동시에 불가결한 것이다. 오로지  이 환상-공간이 부여한 예정된 좌표 없이는 대상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이율배반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대상의 상실이 대상의 인식의 가능 조건인가.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너'의 본질은 처음부터 상실되어 있었다(그것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도시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러한 영원한 이별을 통해 '너'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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