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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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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pr 14. 2021

뱉지 못하는 질문

  대학생 때는 분기마다 한 번씩 가족에게로 갔다. 그마저도 명절 연휴가 대목인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할 땐 대타를 구할 수 없다는 핑계로 네 번은 가야 할 것을 한두 번으로 줄였다. 가족에게 느껴야 마땅할 친밀감이 날이 갈수록 낯설어진 것이 그 결과인지 원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무 일 없이 엄마에게 전화 걸어 조잘거리는 딸일 수가 없었고 여대생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사회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도 마음이 와장창 깨져버려 엉엉 울어댈지언정 가족을 찾진 않았다. 슬픔이나 분노, 절망을 공유하고 이럴 땐 어떡해야 하냐 물을 부모가 없는 셈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누가 그러라고 한 적은 없었으나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기숙사비를 낼 돈이 없다는 그 사실보다 돈이 없는데 어떡하냐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절망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내게 있어 죄인은 항상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점을 잘 받았다는 둥,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둥, 어느 교수님께 칭찬을 들었다는 둥 성인답진 않으나 자식 다울 수는 있는 자랑거리들은 엄마 아빠 대신 언니에게 전해졌다. 그러면 언니는 빠트리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우와! 엄마 아빠한테도 말해줄게!]


  언니는 내가 무심함 속에 숨겨 둔 은근한 기대를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곤 엄마 아빠의 반응을 내게 전달하는 것도 언니의 몫이었다. 나는 별 상관없는 척하면서도 텍스트로 전해오는 자랑스러움에 만족했다. [아빠 기분 좋은가 봐!] 하는 말이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당시의 내 일상에서 분명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좋은가 봐, 그 명료하지도 않은 추측에 좌우되는 스스로의 동심이 불쌍해 또 우울에 빠지는 병적인 자기 연민을 겪으면서도.


  가족에게 방문하는 날은 마음이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았다. 낯선 여행길처럼 불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설레기도 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자주 멀미를 했다. 2시간가량 버스 안에서 흔들린 뒤 터미널에 내리면 늘 아빠의 파란 트럭이 마중 나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툭 던지고 높은 좌석에 앉으면 큼, 하는 아빠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적극성이라곤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반만큼만 돌리며 물었다.


  “오늘은 멀미 안하드나?”


  그러는 동안 시선은 만나지 않았고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내내 흔들렸다. 멀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울렁이는 속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아무거나 던졌다.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자식이고 싶어 버둥대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실패하면 오늘은 멀미가 심하네, 하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시골집에는 작은 마루 하나, 부엌 하나, 안방 하나, 언니와 내가 자는 방이 하나 있었다. 부엌의 왼쪽으로 문을 열고 나가면 욕실이 있었고, 납작한 디딤돌로 길을 낸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마당 한편엔 커다란 앵두나무와 감나무가 앞 뒤로 서있었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풍겨오는 찌린내나 돌로 된 맷돌, 절구 같은 것들이 모두 익숙함으로 한번 덧칠한 배경처럼 무채색이었다. 집 뒤쪽으로는 지하수를 받아놓고 사용하는 물탱크 같은 것이 있었는데 뱀이 자주 나왔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춥거나 눅눅한 느낌이 대부분인 그 집은 다 커서 성인이 된 딸자식이 가족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기에는 여기저기 문제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오래 앉아있으면 온몸 가득 냄새가 배는 화장실과 벽돌 한 겹만큼의 추위밖에 막지 못하는 욕실은 그렇다 쳐도 멀미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작은 방이 가장 괴로웠다. 언니와 함께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혼자일 수도 없는 그 방은 문이라고 할 것이 없어 뻥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순식간에 식사를 끝마치는 식탁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빨리 일어나는 건 주로 나, 가끔은 언니였다. 나는 십 분이 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방의 구석진 자리로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 문지방 너머 안방에서 조용히 수저를 부딪히는 소리, 틀어놓은 TV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휴대폰을 만지곤 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의 이야기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뭔가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할 텐데, 하면서도 좀처럼 구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있다는 것을 어긋나는 시선으로, 어색한 기색으로만 느꼈다.


  엄마는 그렇게 온종일 구겨진 딸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변함없이 말간 얼굴에 흐릿한 눈빛을 하곤 설거지를 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기척도 없이 다가와 문지방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슬쩍 내 눈치를 보곤 맥락 없고 의미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언제 가냐”는 것 같은. 나는 그럴 때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왜 어떻게 지내고 있냐 묻지 않을까.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아르바이트는 힘들지 않은지, 그때 그 기숙사비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같은 것들이 궁금하지 않은 걸까. 나는 신경이 온통 그 생각에 가 있었으므로 대충 대답했다. “내일 가야지.” 나의 의문과 원망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엄마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누워 있는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 기웃거리면서 그 장면들이 생각나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엄마는 항암치료를 시작한 뒤 빠르면 저녁 8시, 늦어도 밤 10시가 되기 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보통날엔 함께 거실에 있다 암환자는 면역력이 중요하지, 잘 자야 면역력이 오른다, 하며 엄마를 들여보냈다. 그러다 그런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놓친 날엔 괜스레 잠든 줄 알면서도 방문을 열어보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기척 없이, 조심스럽게 기웃거리고 있으면 잠에 덜 든 엄마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낡은 갈색 뿔테 안경 너머 흐릿했던 엄마의 시선은 암투병을 시작한 뒤 오히려 또렷해질 때가 있었다. 나는 사실 그런 또렷함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못 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엄마, 자나?”

  “이제 잘라꼬.”

  “응, 잘 자.”


  엄마, 언제부터 그렇게 눈동자가 선명했지? 사실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그뿐일까. 엄마, 엄마 목 아픈 거 그거, 암이 점점 커져 가는 건 아니겠지? 엄마, 이번 항암이 정말 끝인 거겠지? 엄마, 우리 언젠가 좋은 날 좋은 데 구경 갈 수 있겠지? 엄마가 가고 싶다는 경주나 제주도, 같이 갈 수 있겠지? 정말로 그런 날이 오겠지?


  꼭 나처럼 방문가에서 딸을 내려다봤던 엄마의 목소리랑 지금 나의 목소리가 닮아 있었던가. 어쩌면 엄마는 저런 질문들을 다 삼키느라 병이 생긴 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밖으로 뱉지 못하는 질문에 아픈 건 네가 아니라 나라는 걸, 내가 아니라 엄마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짧은 대화 뒤에 닫히는 방문 소리는 유난히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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