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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Mar 06. 2023

시골에 살면 아이들이 예뻐 보인다

  한때 아이들이 무서웠다. 사람은 미지의 존재에 대해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므로. 조카도 없고 동생도 없어 어린이라는 존재를 가까이 두어 본 적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다 첫 발령지에서 덜컥 어린이자료실을 맡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회고하자면 발을 헛디딘 듯 아찔했달까. 아니 발을 내딛자마자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달까. 잘 해낼 리가 없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어린이 한 명을 대하는 일은 어른 열 명을 대하는 일보다 어렵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하는 말을 이 아이가 알아들을까 하는 확신조차 없었다. 어떤 어휘를 쓰는 게 맞는지, 어떤 높이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어떤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모든 것이 다 미지 그 자체였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걱정스러웠던 부분은 초면인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토록 낯을 가려 옆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6개월은 지나야 마음을 여는 마당에, 생전 처음 마주한 생명체한테 목소리를 꾸며내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다니. 주어진 시련을 믿기 어려웠지만 도망칠 방도가 없었으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절히 보여주신 선배의 시범을 녹음해 와 반복해서 들으며 내면에 없었던 텐션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타고나길 낮은 목소리와 웃음기 없는 표정 등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장애물이었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줄 시간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서 도서관의 다른 모든 일을 맡아할 테니 이 일만 빼줬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심정과는 상관없이 때는 다가왔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와 방황하는 시선과 떨리는 목소리로 한 줄 한 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순수하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맑은 시선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왔던 쨍한 웃음소리에 공포가 조금 녹아내렸던 것까지도. 그게 벌써 햇수로 7년 전의 일이다.


  얄궂게도 난 그 뒤로 쭉 어린이자료실에서 아이들을 상대했다. 처음과는 다른 모양이지만 여전히 작은 공포를 가진 채로. 공포의 모양이 바뀐 것은 그들이 얼마나 투명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이 계기였다. 함께 온 부모의 행동을 거울처럼 따라 하는 아이, 감정의 숨김이라곤 없이 고스란히 웃음과 울음으로 표현하는 아이를 보고 느끼고 대하다 보니 두려움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나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 저 작은 체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선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론 자료실을 찾은 아이들에게 내 안의 모든 다정함을 끌어내 조심스럽게 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전제로 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조심히 대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머리와 가슴이 떨어진 거리만큼 다른 문제다. 어린이들을 향한 나의 마음이 애정으로 바뀐 건 그러고도 몇 년이 지난 뒤였는데, 고향인 이곳, 고성에 발령받아 일하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귀하다 못해 희귀한 존재. 이곳에서 어린이는 그런 존재였다.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인구절벽이 현실로 와닿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업무차 방문한 면지역 학교에서는 겨우겨우 두 자리였던 한 학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 1학년의 수는 다섯 손가락으로도 꼽을 정도였다. 나의 모교는 물론이고, 읍내에 위치한 학교를 제외하면 전부가 다 그런 실정이었다. 신입생 수가 0으로 수렴하는 순간 이 학교들은, 이 마을은, 이 지역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래란 상상할 수 없어야 하는 법인데 너무나 생생히 그려지는 미래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어찌나 귀한 존재인가. 요즈음엔 계속해서 그런 생각이 든다. 한국의 저출산은 이미 이 문제로 유명했던 일본을 넘어섰고 방도라곤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곳곳에서 체감하는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시작이 아니라 클라이맥스의 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모든 어른의(혹은 모든 어른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 건강하게 자라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완주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온 지구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 어린이들 말이다. 


  한 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위기감을 느끼고서야 소중하다 생각하게 된 것 자체도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까.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내 아이에 대한 상상은 잘 그려지지 않는 것도 모순이 아닐까. 미지의 존재에서 귀한 존재로, 공포에서 사랑으로 변화한 나의 시선은 부끄러울 일인 게 아닐까.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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