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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Oct 09. 2017

20171009

퇴사한 지 한 달, 이곳에 남기는 첫 일기.

  글을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은 지가 대체 몇 개월 만이지? 매일같이 모니터 앞에 앉지만 트위터에 몇 문장씩 끄적이는 것 외에 어떤 정돈된 글을 쓴 지 너무나 오래 지났다. 어색하다. 역시 어렵다. 

  요 며칠 사이 나를, 아니 어쩌면 몇 개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지옥 같았던 여름부터 나를 괴롭혀 온 것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나의 작은 일기장에 손글씨로 수두룩하게 적혔던(지금도 적히고 있는) 간단치 않은 우울이나 고통이 이곳에도 조금씩 남겨질 것이다. 컴퓨터 타자기의 감각에도 다시 익숙해질 기회일지도 모른다. 타자기 감각에 익숙해질수록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것들과도 가까워질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는 디지털 시대인 데다가, 아마 나는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이 될 것 같고. 잘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으니까.

  어려움과 고충만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꾸려나가는 일상에 대해서도 적을 것이다. 9월 초에 퇴사한 이후로 직장인의 생활 리듬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떤 일상이냐. 평일 오전에 느즈막히 일어나 커피를 끓여 마시고, 식빵과 계란을 구워 간단히 차려 먹고, 여유롭게 설거지를 한 후, 너른 원목형 거실 바닥에 허리를 피고 앉아 가을 바람을 쐬는 일상이다. 내가 그 잔인한 더럽고 치사하고 사람 막 굴리는 파렴치하고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이고 비겁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위계질서를 만들고 '결재만 받으면 된다'는 윗사람들의 관성이 곧 시스템이 되어 평범한 직원들이 하고 싶은 일은커녕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조직을 버리고 나왔다! 내가 내 발로 걸어서 나왔다! 그런 나에게 이런 가을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런 승리감에 가득찬 순간들이 이어진다. 

  퇴사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초록빛 나뭇잎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았는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도 조금씩 기어나온다. 아니, 아직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라고 묻는다면 어. 벌써 그렇다. 대략 3년을 쉬지 않고 직장인으로 살았던 내겐 한 달의 휴식도 잠깐 꾸는 꿈, 깨어나면 다시 바삐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아니, 다르게 말하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추석 연휴가 정말 길었다. 사실 이번 연휴부터 몸과 마음이 다시 추락한 느낌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족이다. 연휴니까 일을 쉬었던 아빠와 오랜 시간 물리적으로 붙어 있어야 했기에 그게 내 육체와 정신 상태에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음.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지 안 좋았다. 내일부터는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각자의 노동 공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도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날 테니 내게도 심적 여유가 생기리라 기대해본다. 그리고 조금씩 기어나오는 이 자그마한 불안의 씨앗들은 어디로 갈까. 맘 같아선 조금도 자라지 못하게 완전히 밟아버리고 싶은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백수'라는 부정적인 네이밍으로 낙인 찍는 사회의 시선에 나는 여전히 취약하구나. 회사를 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생생히 기억하여 재생하는 칩을 머릿속 한 구석에 꽂아두고, 내가 직장을 다니지 않는 상태임을 자각할 때마다 칩을 작동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의 몸이 어떤 잔인한 경험을 생체 리듬에 오롯이 간직해둘 수 있는 정교한 물질이라면, 정말 내 뇌에 그런 칩이 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칩은 아직 잘 작동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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