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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Sep 12. 2023

이야기는 변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나 목사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성경을 적혀진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라고 믿는 듯 보인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스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불경을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듯 보인다. 


나 또한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다. 불경에 "세존께서 말씀.."이라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그 육성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야심경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사리자에게 말하는 형식이기에 "사리자야.."라며 꼬박꼬박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이어간다. 이 때문에 난 반야심경이 석가모니가 한 말을 그대로 녹음하듯 받아 적은 것인 줄만 알았다. "녹음기나 종이나 붓도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그렇게 받아 적었지?"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경전을 수백 명이 따라 외우며 그 많은 경을 토시 하나 안 틀리며 외우는 지금과는 다른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다는 주장에,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수긍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가 성스럽다 여기는 글들이 정말 어떤 왜곡이나 변함없이 스승의 입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걸까? 그게 가능은 할까?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지만, 
천리를 간 말은 때론 소나 닭이 되어있다. 

우리가 익숙한 동화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들어보면 흥미롭다. "나름 받아들여질 만한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겁니다"라는 부분이 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면 이야기는 거기에 맞게 변하기 마련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듣기를 바라면,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게 쉽게, 또는 받아들이기 쉽게 바꿔서 말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변해간다.

일상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같은 말을 여럿이 들어도 듣는 사람은 각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이야기를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다양하게 변해간다.

귓속말 전달 게임을 해보면 언제든지 이 사실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영어로 The Telephone Game인데, 같은 말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 보는 놀이다.


내가 믿는 성스러운 이야기들은 이런 현상에서 예외일까? 마치 하나님이 직접 새겨 넣었다고 전해지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처럼 성스러운 나의 이야기들은 어떤 왜곡이나 변형 없이 말하는 이에게서 나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걸까?

내가 믿는 성경은 이런 현상에서 예외일까? 다들 최고의 진리라고 믿는 반야심경은 이런 현상에서 예외일까?


조금만 뒤로 물러나서 보면 오해할 일이 없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
금강경은 한결같이 이렇게 시작한다. "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굳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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