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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Feb 01. 2024

당연함 속 모호함 뒤에 숨은 권력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호함을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국민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가.." "국민을 위해 준비한.." "국민을 위해 고민하는.." "국민을 위해 바꾸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새기고 믿어야.."

다들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말이다.

유명한 링컨의 연설에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국민을 언급한다.

좌, 우, 여, 야, 국가를 떠나서 권력을 잡고자 하는 사람이나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국민을 위한다고 외친다.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국민을 위한 다는 말 뒤에는 당연함 속 모호함 뒤에 숨은 권력이 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호함을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대부분 국민은 "국민을 위한"에서 '국민'을 너무도 당연한 개념으로 여기면서 여기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국민'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소수의 부자도, 다수의 가난한 사람도, 소수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다수의 힘이 없는 사람도, 소수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도, 다수의 기득권이 없는 사람도, 소수의 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도, 다수의 도시에 사는 사람도, 노인도, 아이도, 청년도, 중년도, 남자도, 여자도, 성소수자도,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세금을 잘 내는 사람도, 세금을 회피하는 사람도, 범죄자도, 선량한 시민도, 선거에 나가는 후보도, 투표하는 시민도, 투표에 관심 없는 시민도, 대중교통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전혀 없는 사람도, 술 마시는 사람도, 술 마시지 않는 사람도, 흡연하는 사람도, 흡연하지 않는 사람도, 결혼한 사람도, 이혼한 사람도, 미혼인 사람도, 아이가 있는 사람도, 아이가 없는 사람도, 부동산이 있는 사람도, 부동산이 없는 사람도, 신용이 좋은 사람도, 신용 불량자도, 다 모두가 국민이다.

'국민'은 이 모두를 다 포함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국민이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수많은 종류의 국민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권력을 잡고 있거나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모호함 뒤에 숨는다. 이 모호함에서 권력이 나온다. 모호함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고 그 국민이 어떤 국민인지를 정하는 것이 권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권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국민을 위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든 그 혜택을 받는 국민이 존재한다. 그 국민이 소수이든 다수이든.


모호한 개념은 당연하게 보여야 한다. 그래야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호함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은 입을 막아야 한다. 권력은 모호함을 당연함으로 위장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다른 이의 양심을 믿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선량함 때문일까? 사람들은 권력이 말하는 당연함을 받아들이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라고 말할 때, 그 국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국민인지를 묻지 않는다. 때론, 너무도 당연해서 이것이 물어야 할 의문인지조차 모른다.


국가 권력만 이런 모호함을 이용하지 않는다. 누구든 관계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런 모호함 뒤에 숨는다. 사기꾼이 대표적이다. 의도된 범죄가 아니라도, 일상의 계약이나 약관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법이나 규범, 관습도 예외가 아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인류의 역사에서 당연함 속 모호함을 이용하는 대표적 권력은 아마, 종교 권력이 아닐까? 국가가 생기기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종교는 있어왔다. 종교는 당연함으로 포장한 모호함을 아주 잘 이용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라고 묻는다.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답할 수 없다. 질문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대신 되물어야 한다. "하나님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요?" 또는 "믿으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뭐죠?" 너무도 당연한 하나님이 뭐냐고 잘못 물었다가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봉변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는 성경이 잘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이 잘못 말했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하나님'의 존재를 명확히 알면, 하나님 말고도 물어야 할 것이 더 있다. '믿는다'는 것이 뭔지를. '하나님' 믿고 말고 할 존재인지. 이 물음은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하기에 나중에 다른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을 믿으세요"라는 물음이나 권유에 대부분은 하나님이 뭔지는 묻지 않는다. 믿느냐 마느냐에만 집중하지, 정작 믿어야 하는 그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이미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상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살펴보면 종교마다, 교회마다, 목사님마다, 교인들마다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 다르다.

이 모호한 '하나님'이 어떠한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에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 알려주는 일은 목회자의 권리다. 어디에도 빼앗겨서는 안되는 핵심적인 권리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권위로 포장하고 이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선하다고 말하고 '절대 선'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한다. 절대 선은 너무도 당연한 개념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면 안 되는 당연함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보는 시점에 따라 하나의 대상과 행위는 선이 되었다가 동시에 악이 되기도 한다. 상대적이기에 정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이를 정하는 일을 독점하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이 정하는 선에 의문을 달거나 대항하면 악으로 규정된다. 사람들이 선과 악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절대'라는 말을 붙이고, 자신들이 정하는 선을 절대 선이라고 권위를 부여한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기에 사람들이 믿고 따라야 하는 당연함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
모든 선함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그 뜻과 행위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선하시다.

김영진의 '시로 쓴 조직신학'

당연함으로 위장한 모호함은 세상에 흔하다. 그 가운데 가장 깊고 알아차리기 어려운 당연함은 뭘까?

너무도 당연해서 결코 의문을 가질 상상조차도 못하는 당연함이 있다.

바로, '나'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나.'

이 '나'의 당연함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당연함 속에 숨어 있는 모호함을 눈치채면서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의문을 던지는 이를 '찾는 이'라고 한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일 것이다.


세상 당연함의 공함을 알아차리다 보면
끝에 만나는 당연함의 끝판왕이 있다.
'나'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세상과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당연하다 믿어왔던 것에 의문이 든다면, 기회다.

답은 어렵지 않다. 그저 정말 당연한 것인지만 살펴보면 된다.

그렇게 살피다 보면 당연함의 '공 (空)'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당연하다고 믿어온 착각만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책 '반야심경의 비밀'에 이런 문구가 있다.

"답은 늘 당연함 뒤에 숨어있다."

공하다.
어디 정해진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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