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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Feb 20. 2024

살인자ㅇ난감이 던지는 철학적 물음에 답하는 반야심경

정해진 선과 악이 있는가?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살인자ㅇ난감" 드라마 시리즈를 재밌게 봤다. 탄탄한 구성과 실감 나는 연기, 그리고 예술 같은 편집과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다루는 주제의식이 눈길을 끌어 이렇게 글을 쓴다.


드라마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여러 물음을 던진다. 다들 품고 있는 의문이지만 답을 찾지 못해 헤맨다. 이 답을 여기서 같이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답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니라 찾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답은 뻔하다. 물음 그 자체에도 답이 있다.

살인자ㅇ난감 예고편

'살인자ㅇ난감'은 2024년 2월 9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살인자ㅇ난감" 드라마 제목에 "ㅇ (이응)" 자음만 넣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제목이 달라지도록 했다. "살인 장난감," "살인자 오 난감," "살인자의 난감," "살인자와 난감"으로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한 글자의 차이에 따라 '살인자'와 '난감' 사이에 다양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드라마가 던지는 물음에 각자의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답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고민하는 물음을 세상에 던져 같이 고민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의 눈에는 "ㅇ"이 '공'으로 보였다. 동그란 야구 공이 아니라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 (空)"이다. 반야심경 해설서를 쓴 내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던지는 주제의식이 정확히 반야심경의 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살인자ㅇ난감"은 살인자가 정해져 있는지, 죽어 마땅한 사람이 정해져 있는지, 착하고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는지, 그리고 정해진 선과 악이 있는지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에 많은 이가 공감하기도 하고, 이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이들은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관이 흔들리면서 충격받기도 한다. 그리고 깊이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다.


이렇게 던져진 물음에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여기서 그 답으로 안내한다. 반야심경에는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다. 바로 "공 (空)"이다.

이 글은 농담을 다큐로 받는 글이다. 대충 던진 물음을 물고 깊이깊이 심해의 바닥까지 내려간다. 별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한다. 잘 못하면 믿어왔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은 웹툰이다. 드라마는 그 웹툰의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아래 영상은 웹툰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이야기가 던지는 물음을 잘 살펴 정리해 놓았다.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에는 해답이 없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드라마에서 형사 '장난감'은 "피해자, 가해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이 가리키는 바다.

3화 14:02 장면, 장난감 형사의 대사다.

살인당한 남학생들은 피해자지만 그전에 한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자살에 이르게 한 가해자였다. 드라마에서 이탕에게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은 다른 이들을 죽인 가해자였다.


성폭행 당해 자살한 여학생과 그 아버지에게 성폭행한 남학생들은 죽어 마땅한 나쁜 가해자지만, 그 남학생들의 부모 시점에서는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자기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학생과 그 부모는 재수 없는 가해자다. 다른 사람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각자의 시점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정한다.


나쁜 사람을 죽이는 이탕은 사회가 정한 법을 지키는 일을 하는 형사 장난감에게는 사회의 악이다. 그저 살인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자살하게 만든 남학생들을 죽여준 이탕은 딸의 아빠에게는 고마운 은인이다. 같은 사람도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선한 사람이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기도 하다.


"친구 잘 못 만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고 시력이 거의 없어진 내 딸," 선여옥은 엄마에게는 불쌍하고 착한 딸이지만, 대중의 시선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이다. 이후, 그런 좋은 부모를 살해한 선여옥은 대중에게 천륜을 어긴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


이탕도, 이탕과 함께 하는 노빈도, 이 탕처럼 노빈과 함께 했던 송초도, 그리고 그들을 쫓는 형사 장난감도, 모두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목숨 바쳐 뛰지만, 다들 자신의 정의가 정당한 정의인지 확신이 없다. 


노빈은 악한 사람을 죽여서 정의를 구현하는 이탕을 영웅이라 여기고 그 영웅을 보좌하는 자신을 사이드 킥이라 여긴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노빈에게 필수적인 것은 정해진 정의다.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는 노빈의 행위는 정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정의여야 한다. 하지만 정해진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 정의 인가? 누가 죽어 마땅하다고 결정하는가?


악을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것이 정의이지만 정해진 선도 정해진 악도 없다는 사실이 드라마에 잘 나타난다. 드라마를 보는 당신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도 드라마도 당신도 물음만 던질 뿐 확신하지 못한다. 너무도 뻔한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너무 뻔한 답을 이미 당신은 알고 있다.
그저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무엇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이 또한 너무 뻔하지 않은가?

이탕의 어머니는 교회를 다닌다. 이탕이 아무리 캐나다를 간다고 말해도 호주에 가는지 안다.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 교회에서 어머니가 이탕에게 살인 사건에서 죽은 피해자에 관해 말한다. "너, 거 일했던 편의점 근처에서 살인사건 난 거 알지? 그런 놈은 죽어도 싸. 그거 하나님한테 벌받은 거야, 그거." 


절대 선하신 하나님이 인정한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정해진 선이신 하나님이 정한 정해진 악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탕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 자신의 시점에서 보는 상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 악을 하나님이라는 절대 선을 내세워 절대적 악으로 포장한다. 모두가 공감하는 악한 사람이기에 드라마를 보는 이는 어머니 말에 공감하지만, 이것도 나의 시점에서 공감하는 것이지 절대적일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이탕의 어머니처럼 절대적인 악이라고 믿고 싶다면 잘 살펴보라,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 실제로 절대적인 것인지.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어도 된다.
다만, 그것이 믿음이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우리는 다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대적인 가치를 절대적으로 포장한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세상의 도덕이든, 법이든, 하나의 포장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늘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속 깊이 잘 안다. 그래서 드라마에 던지는 물음에 공감한다. 공감은 하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들 수도 있다. 포장을 뜯어내도 될지 확신이 없다. 아니면, 포장지를 뜯어내기 싫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심지어 이것이 포장인지도 모른다.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이 직접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확인해 보면 된다. 정말 정해진 선과 악이 있는지. 정해진 정의가 있는지. 정해진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답이 보인다. 너무도 선명한 답이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답은 명확하다. 그저 정해진 것이 있다고 오해했을 뿐이다. 그 오해했다는 사실만 알면 그만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답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답인 것 같은데 확신이 없다. 너무도 오랫동안 정해진 것이 있다고 배워왔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믿고 있기에 답이 보여도 선 듯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먼저 답을 받아들인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그 답을 먼저 받아들인 스승이 주는 도움이다. 스승의 안내가 당신이 직접 살펴서 확신을 갖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정해진 것이 있다면, 절대적이라면 어떻게 의문이 들 수 있을까?
그래서, 의문이 든다는 것 자체가 답이다.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정해진 선과 악이 있는가?"라는 의문에 반야심경은 그런 것 없다고 분명히 답한다. 

책 '반야심경의 비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하다. 어디 정해진 것이 있는가?"

책 '반야심경의 비밀' 공

반야심경은 '공하다'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불구부정 (不垢不淨)"이라 말한다.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라는 말이다. 정해진 더러움이나 깨끗함이란 없다는 뜻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은 반야심경에서 세상의 가치를 대표하는 말인데, 불구부정은 정해진 가치란 없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가치는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보는 이가 정한다. 가치의 본질이 그렇다.


다음은 책 '반야심경의 비밀'에 나오는 '불구부정'의 설명하는 부분이다.


不垢不淨

불구부정


모든 현상이 공하면 더럽거나(구, 垢 ) 깨끗하게(정, 淨 ) 보이는 가치도 공한 것은 당연하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점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가치다. 우리는 정해진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정의와 부정에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가치가 특정한 대상에 내재한다고 믿는다. 선과 악의 실체가 있다고 믿으며 절대 선으로 ‘신’을 떠올리고 절대 악으로 ‘악마’를 떠올린다. 하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불구부정’이라며 정해진 가치는 없다고 선언한다.


가치는 가치를 정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 존재할 뿐이다. 가치는 사람의 시점에 따라 변한다. 우리에게 ‘선’이 저들에게는 ‘악’일 수 있다. 같은 사람의 시점도 시간이 지나면서 또 바뀐다. 좋았던 것이 나의 시점이 변하면서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시점 없이 가치도 없고, 또 정해진 시점도 없다. 그러니 대상이 가지는 고유한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정해진 가치가 없기에 모든 가치는 공하다.

모든 가치는 대상이 아니라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당신의 생각 속에 있다.

원인 또는 이유도 가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원인과 이유도 현상을 특정한 시점에서 해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기(緣起) 또는 인연(因緣)이라는 개념과 함께 원인과 결과에 법칙이 있다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을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어떤 ‘것’들이 어떤 ‘것’의 원인이 된다거나 어떤 ‘사건’들이 특정 ‘사건’의 원인이 된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석가모니의 가리킴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분명 석가모니는 반야심경을 통해 ‘시제법공상’, ‘불구부정’이라고 말한다. ‘연기(緣起)’는 반야심경의 핵심인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지 않다. 분명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지만 특정한 원인은 따로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어떤 것이 생겨나는 데는 세상 전체가 원인이 된다. 세상 어느 하나 없이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무엇 하나만 쏙 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각각 다른 모든 것에 의지해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緣起)’로 스승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원인을 찾고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한정된 인식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일어나는 현상을 해석하기에 그렇다. 사람들이 말하는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시점에서 보는 해석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정해진 원인이나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직접 주위를 살펴보라. 가만히 따져보라. 모든 원인과 결과의 공함이 보이는가? 깊이 살펴 직접 이 사실에 눈뜨면 오해할 일이 없다.


불구부정은 공하다를 설명하는 하나의 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익숙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구절이 있다. 불구부정에 깊이 공감하며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은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는 다음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드라마가 던지는 의문에 대한 답을 좀 더 깊은 수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주제를 좀 더 다른 시점에서 살펴보는 이전 글들이 있어 소개한다. 같이 읽어보면 이 글에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 것이다.

"죽이고 보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다."라고 이탕이 말한다. 드라마에서는 정말 우리 모두가 공감할 정도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살인하는 것으로 나오기에 죽어 마땅한 인간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드라마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정해진 죽어서 마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닐까? 누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정할 수 있을까? 


"누구를 죽이든, 죽어 마땅한 인간들로 만들 수 있다."가 아닐까? 정해진 것이 없기에 보는 시각만 바꾸면, 누구든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송초가 미대생이었던 여자를 죽일 때, 여자가 무엇을 말하던 죽어 마땅한 이유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시각을 정하는 것이 힘이다. 드라마에서는 칼을 든 살인자이고 큰 세상에서는 권력이 이 힘을 가진다.

정해진 것이 없기에 내가 정하면 그만이다.

다음은 선과 악의 시점을 정하는 권력에 관한 글이다.

다음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던지는 의문을 살피는 글이다. "그런 신의 의도가 무엇일까요?"라고 사이비 교주 정진수는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정하는 뜻을 신의 뜻이라며 사람들이 듣기를 바란다. 정해진 신의 정의가 있다며 신의 뜻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해진 신의 뜻이 있을까? 사람들이 신의 뜻이라고 말할 때 진정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신의 뜻'의 본질이 뭘까? 아래 글은 이런 '신의 뜻'의 본질을 살펴본다.

신의 뜻과 함께 우리는 죄를 말한다. 선과 악에 관한 물음은 죄의 본질을 묻는 의문과 다르지 않다. 아래 글은 '죄의 본질'을 살펴보는 글이다.

불구부정을 설명하는 글에서 정해진 선과 악이 있는지와 함께 정해진 이유가 있는지를 살핀다. 다음 글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8)’에 나오는 장면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정해진 이유가 있을 수 있는지 살핀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는다. 반야심경은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스승의 글이다. 다음 글은 이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책을 소개한다. 책은 쉬운 말로 반야심경을 풀이하면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위 글들을 읽고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이는 아래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위 글을 읽고 더는 물음이 없다면 책은 필요 없다.

답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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