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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Apr 10. 2022

이것이 "신의 뜻"이다.

본질을 바로 보면 의문이 없다.

세상에는 신의 뜻을 말하는 이가 많다. 누구는 이것이 신의 뜻이다, 누구는 저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각자 다른 신의 뜻을 가지고 부딪힌다. 세상 사람들은 다양한 신의 뜻들 가운데 각자 마음이 가는 것을 붙들고 믿는다. 그러나 누구도 확신이 없다. 그저 믿고는 있지만 "정말 이것이 신의 뜻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에 마음이 불안하다. 아무리 당신이 겉으로 확신을 말해도마음속 저변에는 늘 의문이 불안과 함께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신의 뜻'일까? '신의 뜻'이란 무엇일까?


여기, 신의 뜻을 살펴보려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붙드는 '신의 뜻'의 본질을 들여다보려 한다. 당신의 두 눈으로 '신의 뜻'을 직접 마주하고 '신의 뜻'을 넘어 '신'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한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원전 480년 즈음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 아테네의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섬에서 해전으로 페르시아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사령관은 델포이의 무녀에게 신탁을 구하는데, 무녀 아리스토니케는 사령관이 원하던 대로 살라미스 섬에서 해전을 벌이라는 제우스 신의 말을 전달한다. 이제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벌이는 일은 한낮 사령관의 의견이 아니라 '신의 뜻'이 되었다.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신탁을 십분 활용하여 사람들을 설득했고 아테네 연합군은 살라미스 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대패 시켰고 결국 제국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아마 이때 동양의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점령했더라면 그리스 아테네를 문명의 뿌리로 생각하는 지금의 서구 문명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들 말한다.

(참고: 델피의 신탁과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

영화 십계명의 포스터

구약 성서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극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가 자신의 백성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계명을 준다. 계명은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는데 민족의 신 야훼께서 직접 돌판을 만들고 새기셨다 한다. 모세가 산에서 '신의 뜻'이 새겨진 돌판을 가지고 오는 날 자신이 없는 사이 계명을 어기며 우상 숭배를 행한 백성 3천 명을 처형시킨다. 처형당한 이들은 단순히 권력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전하는 '신의 뜻'을 어겼기에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견디며 모세를 믿고 이집트를 탈출한 자신의 백성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냐"라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뜻'으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무당이 신점을 보고 있다.

무당은 대게 신을 모신다. 모시는 신의 종류는 다양하다. 옥황상제에서부터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나 고려의 최영 장군 같은 역사 속 인물이나 불교의 보살이나 도교의 도사도 있고, 별자리를 대변하는 신령도 있고, 용이나 호랑이 영신도 있고, 가문의 조상신도 있고 특정 산의 산신령도 있다. 신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손님이 점집을 찾아 질문을 하면 무당은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부탁해 손님의 질문에 답을 구하고 신을 대신해 손님에게 신의 말을 전한다. 이것이 신점이다. 무당은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영험한 "신의 뜻"을 손님에게 알려준다. 손님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신의 뜻'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가운데 한 장면.

최근 화제 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는 '신의 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초 자연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허공에 반투명한 큰 얼굴이 나타나서 한 사람을 향해 "박정자, 너는 5일 후 15시 죽는다. 그리고 지옥에 간다."와 같이 특정한 시간에 지옥에 간다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이 되면 거대한 세 괴물이 나타나서 그 사람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뜨거운 열로 태워 죽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몸서리치게 하는 정말 지옥같이 끔찍한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정진수'라는 인물이 따라다니면서 연구하고 아직 이 현상에 낯선 한국 사회에 자신의 해석과 함께 알린다. 정진수는 허공에 나타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을 '천사'가 지옥행을 '고지'하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폭력을 행사해 죽이는 일을 '사자'가 나타나 고지를 '시연'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지옥행 고지를 받는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신이 행하는 일이라며 이런 일을 일으키는 신의 의도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진수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데 성공하고 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지금 신께서는 너무나 직설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지옥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런 신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


이렇게 정진수는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권위를 선점한다. 정의가 무엇이고 죄가 무엇인지는 정진수의 입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언제 누가 죄인이 될지 모르기에 두렵다. 두려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진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면서 단체는 종교가 된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아이스크림을
핥지 않는다.


세상에는 자신의 말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도 확신에 찬 모습으로 신에게 직접 들었다고 신의 뜻을 말하고 나름대로 증거를 내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신의 뜻'들 가운데 마음에 와닿는 뜻을 믿고 따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신의 뜻'을 따른다기 보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을 믿고 따른다. '신의 뜻'은 전달하는 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이'와 '신의 뜻'은 분리될 수 없기에 전달하는 이가 곧 '신의 뜻'이다. 이 때문에 '신의 뜻'이 달라져도 사람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신의 뜻'과 전달하는 이가 동일시될 때는 그가 어떤 말을 해도 곧 '신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신'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을 전하는 이나 그를 믿고 따르는 이나 마찮가지다.


본질을 바로 보면 의문이 없다.


지금까지의 글을 읽고 세상에 퍼져 있는 신의 뜻을 가만히 살펴보라.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의 뜻'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 보라. '신의 뜻'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신의 뜻'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살펴보라.


​세상 모든 '신의 뜻'은 다 같다. '제발 내 말 좀 믿어달라는 마음의 표현'이 '신의 뜻'이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 '신의 뜻'은 내 말이 맞으니 제발 내 말 좀 믿어달라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의 뜻'은 따로 없다. 정해진, 절대적인 '신의 뜻'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뜻'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뜻'이란 전하는 사람의 해석이다. 필연적으로 하나의 시점이다. 이 '뜻'이 절대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동전이 한 면만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은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신'은 너무도 선명히 있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신의 뜻'은 있을 수가 없다. 진정 절대적인 '신의 뜻'이 있다면 누가 말하든 그 뜻이 다 같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퍼져 있는 "신의 뜻"을 보라. 전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또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르다. 거울들이 같은 물건을 비친다해도 각각의 거울에 비친 상은 같을 수가 없다.


누군가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면, 비난하거나 거부할 필요 없다.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면 된다. 주변 사람이 어떤 '신의 뜻'을 믿고 있다면 그냥 놔두라. 그 또한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신'을 바로 알면 세상에 '신의 뜻'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신'은 모두이다. '것'과 '것이 아닌' 모두이다. 존재 자체다.


신의 뜻을 내려놓고 신에게 바로 가라.


이 글은 '신의 뜻'을 쫓는 이를 위한 글이 아니다. '신의 뜻'이 아니라 '신'이 궁금한 이들을 위한 글이다. "하나님을 믿으라"라며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궁금한 이들을 위한 가리킴이다. 다른 이가 전해주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 '신'과 직접 마주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안내다.


'신'이 궁금한 당신, 다른 이들이 말하는 '신의 뜻'에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면 '신의 뜻'을 내려놓고 '신'에게 바로 가라. 세상에서 들은 모든 '신의 뜻'을 내려놓으면 '신'은 자연히 드러난다. 늘 '신'은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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