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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Mar 24. 2022

무지 역무득 無智 亦無得 (반야심경)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지혜도 없다.

스승은 다시 한번 말한다. 지혜가 따로 없기에 '당신'이 얻을 지혜란 없다고.

지혜는 있다. 반야는 있다. 진리는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있다. 다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따로 없다. "얻어서 당신 가슴속에 숨겨둔 목표에 써먹을 지혜는 없다."라고 스승은 분명히 말한다.


반야심경은 반야라는 지혜를 가리킨다. 궁극의 지혜인 마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가 따로 없다고 하지?"라고 의아할 수 있다. 물론 지혜는 있다. 하지만 궁극의 지혜 반야는 당신이 이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지혜가 아니다. 이 때문에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뭔가를 배우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진리는 오직 가리킬 수만 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이 아니다. 당신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존재 자체다. 이 때문에 책 3장 '찾음'은 '찾는 이가 찾아진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래서 찾음의 길은 선(line)이 아니라 점(point)이라고 말한다.


핵심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혜가 따로 없는데 어디 얻을 지혜가 따로 있을까. 석가모니는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야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무엇을 가리킬 뿐이다. 당신이 직접 눈을 뜨고 보도록.


'무엇’을 찾는 한, 찾음은 끝나지 않는다. 찾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면 찾아져도 그 대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찾아졌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상이 한정되고 그 무엇이 어떠할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으면 찾아지는 것은 그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날 수 없다. 찾고자 하는 무엇은 사실, 이미 여기 지금 있다.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찾음은 허상이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찾음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그저 찾음이다' 167쪽에서 가져옴.

많은 학자들이 반야심경을 해설한다. 다양한 불교 가르침을 분석 정리한다. 철학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불교 철학이란 이름표를 붙이고 석가모니를 철학자로 분류한다. 그리고 선 불교에 관한 논문을 쓰고 선 스승의 화두를 분석해서 설명한다. 선의 불립문자(不立文字)와 화두를 언급하며 언어를 벗어나라고 선에서 일컫는다면서 여전히 언어로 불립문자와 화두를 분석하고 정리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라는 말을 소개하며 여전히 손가락을 붙들고 분석한다.

철학자의 운명이다. 모든 학자들의 운명이다. 학문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꿀 물의 달콤함에 빠져서 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리들처럼 철학자도 언어의 달콤함에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는 파리 신세라고 말한다. 이렇게 언어와 기존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철학의 역할을 제시하지만  그도 이것을 언어로 적어낼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도대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가?"라고 되묻고 싶다.

많은 이가 진리를 언어와 논리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쳇바퀴를 돈다.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다른 이의 이야기다. 그렇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면 우리는 보통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혜라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지혜가 '진리'라는 말과 엮이면 뭔가 대단한 지혜가 있을 것만 같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나 노자나 예수 같은 분들은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분들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절대적인 지혜가 있을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을까?

지혜의 본질을 살펴보면 의문은 사라진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지혜라는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라. 어찌 보면 다 결과론적 이야기일지 모른다. 같은 생각으로 결과가 나빴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우둔함이 된다. 누군가 지혜라고 여기는 것을 누군가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삶의 지혜라고 꾸짖는 노인의 말을 어린 친구들은 꼰대라는 말로 비꼴지도 모른다. 석가모니의 지혜가 크리스천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살펴보라. 절대적인 지혜라고 할 것이 있는가? 늘 변하지 않는 지혜가 있는가? 세상 모든 이가 동시에 지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은 것'과 있는 그대로 절대적인 것은 다르다. 우리가 믿는 지혜라는 것들이 가만히 보면 그 또한 상대적인 가치가 아닐까?

'지혜'의 본질을 바로 보면 '무지 역무득'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왜 지혜가 따로 없다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지혜가 따로 없는데 어디 얻을 지혜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공한데 지혜라고 예외일까.

매일 아침 반야심경을 낭독하며 "무지 역무득"을 수없이 되뇌지만, 늘 뭔가 얻을 지혜를 쫓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스승은 그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반야를 '지혜'라고 번역하지만 이때 '지혜'는 우리가 말하는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하나의 가리킴이다.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내려놓을 때, 모든 지혜의 공함을 바로 볼 때 드러나는 무엇이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해야 가리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이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왜 스승들이 진리를 향하는 길이 얻는 과정이 아니라 덜어내는 과정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얻을 지혜가 없기에 얻을 진리도 없다. 이미 쌓여있는 수많은 편견과 오해를 덜어내고 덜어내면 '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본질을 바로 보면 의문이 없다. 모든 의문이 사라지면 그때가 찾음의 끝이다. 더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 '무지 역무득'이다.


반야심경 전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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