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넘어 스승 석가모니 가리킴을 본다.
이 블로그의 글과 다른 글들을 체계적으로 엮으며 빈 곳을 메꾸고, 다듬고 다듬어
책 '반야심경의 비밀 (반야심경 우리말 번역과 해설)'을 내놓았습니다.
블로그의 한계로 전하지 못한 체계적이고 좀 더 깊은 해설을 만나실 수 있기 바랍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의 실체가 공함을 바로 보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렇게 공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괴로움이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느니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니 명심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능히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기에 헛되지가 않느니라.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한글 반야심경 2020, 반야심경 한글 번역, 관음 옮김
관자재보살, 언어를 넘어서 가리키다.
가슴에 화두라는 씨앗을 품고
간절함이라는 물을 주면
언젠가 앎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이 경배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스승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씌운 자신의 믿음인가?
스승은 이미 답했다.
문제는 이 답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느냐다.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의 실체를 알려 한다.
지금 여기 실재하는 실체를 찾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꿈과 현실'에서 가져옴
잊지 말라.
깨달음의 과정은 얻는 과정이 아니라
내려놓는 과정이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존재하는 것이 뭘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성령이며 부처이며 참인식이며 관세음보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닷속의 물방울은 다 바다다. 바닷속, 독립된 물방울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절대 평등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실체는 둘로 구분되지 않기에 평등하고 말고도 없다. 그래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해서 원래부터 깨닫지 못한 이는 없다. 깨달은 이도 없다. 깨달음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유일한 차이는 이 사실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만 있을 뿐이다. 몰라도 신경 쓰지 않는 이와 알고 싶어 하는 이만 있을 뿐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42쪽
'무엇’을 찾는 한, 찾음은 끝나지 않는다. 찾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면 찾아져도 그 대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찾아졌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상이 한정되고 그 무엇이 어떠할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으면 찾아지는 것은 그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날 수 없다. 찾고자 하는 무엇은 사실, 이미 여기 지금 있다.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찾음은 허상이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찾음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그저 찾음이다' 167쪽에서 가져옴.
사람들은 각자 큰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길은 내가 가는 이 자리다.
다른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있다.
내가 지나온 흔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한다고 정해진 길은 없다.
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길은 내가 가는 이 행위다.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오랜 찾음이 끝났다. 찾아지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도 선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찾음을 끝낸 모든 이에게 찾아지는 것은 다 똑같다. 다를 수가 없다. 수천 년 전의 석가모니나 예수든, 근대의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든, 동양의 노자든 서양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든, 지구상의 스승이든 은하수 저 너머 외계의 스승이든,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들어가는 말' 글 6쪽에서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믿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찾는 이들은 스승에게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질문하지만 대부분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깨달음의 전제조건에서
궁극적 깨달음에 전제조건은 없다. 얻어야 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없다. 이미 있는 그대로에 더해야 할 것도, 덜어야 할 것도 없다. 이 ‘있는 그대로’ 안에서 많은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만 같다. 스승은 “그냥 있으라”라고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스승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라고 하지만, 당신은 완벽한지를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게 된다. 뭔가를 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찾음에서 뭔가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할 때는 어떤 목적도 필요 없다. 뭘 얻고자 함이 아니다. 누가 뭘 얻겠는가? 뭔가를 얻으려고 목표를 세우고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부작용을 낳는다. 물론 이런 부작용도 가는 길의 일부이기에 사실 부작용이란 없다. 목표를 이루려는 모든 행위는 결국 모든 목표를 내려놓는 길로 가는 여정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수행에서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
가리킴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해가 적다.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진리가 아니라 일회용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4장 가리킴에서
이 모두가 가리킴이다.
진리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일 뿐이다. 헛소리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에서
있는 모두가 관세음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