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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Sep 28. 2020

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때, 많은 이들이 반야심경의 이 마지막 부분을 신성시하며 만트라는 번역하는 게 아니기에 뜻을 생각하지 말고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상 최고의 신비하고 대단한 주문이니 주문 자체에 뭔가 대단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분명 반야심경은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그들의 믿음처럼 그런 것이 있었으면 오랫동안 중국이나 한국의 수행자들은 다 헛일한 샘은 아닐까.


산스크리트어를 비슷한 한자 음으로 음역하고 그 한자음을 다시 한글 음으로 옮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이고 IAST에서 나타내는음운은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이고 IPA에서 나타내는 음운은ɡəteː ɡəteː paːɾəɡəteː paːɾəsəŋɡəte boːdʱɪ sʋaːɦaː이다. 분명 우리가 발음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랑 비슷하기는 하다. 비슷하다는 것도 이 발음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기에 그렇다. 고대 인도인이 들으면 전혀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혹, 우리가 바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 반대의 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국 식당에 가서 보니 나이프는 있는데 포크가 없어서 "포크 좀 갖다 주실레요? Could you give me a pork?"라고 말하면 돼지고기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Folk의 "F" 사운드를 바르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듯 한글 음대로 "P" 사운드로 "포크"로 발음하면 나이프 옆 포크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된다.

나와 너가 점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말이 되는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한국말이 서툰 남자가 한국 여자분에게 "너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차마 만났을 때 말은 못 하고 전화를 걸어 용기 내어 말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여자분이 왜 전화해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지 몰라 황당해서 "... 응... 그래서?"라 반문한다. 남자는 바로 뭔가 잘 못된 걸 직감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한국말이 어설픈 외국인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기사분이 이리 가면 되냐고 여러 번 묻길래 택시 기사에게 여러 번 "계속 직진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택시 기사분이 화가 나 보였다 한다. 한국인 친구가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니 "계소키 직진해요."로 들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외국인 친구에게 욕같이 들렸을 수 있겠다고 일러준다. 자칫 욕 같은 이 말에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택시 기사분이 성질 있는 분이셨으면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라고 덧붙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콜라를 모르는 조선시대 수행자가 "콜라콜라 코카콜라 팹시도콜라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우스게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뼈 있는 말이다. 흘려들을 소리가 아니다. 여전히 "혹시나.. 그래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자신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직도 "그래도, 혹시나"하면서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 하며 바라는 찾는 이는 마지막 부분을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행이라 여긴다. 스승은 오늘도 자신의 노력만을 탓하며 뼈 깎는 수행을 이어가는 수행자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침묵으로 충분할 가리킴이 길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도 설하게 된다. 이 또한 다 있는 그대로인 것을 스승은 잘 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수많은 수행에 관한 환상과 믿음을 내려놓고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수행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 피안(彼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것이 수행의 본질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아제아제 바라아제


신비한 주문을 번역하면 안 된다는 한때의 믿음을 뒤로한 채 요즘은 이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서 알리는데, 한글 위키피디아에 나온 다음 번역이 일반적이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그런데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

(일단 직역해보면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 깨달음이여, 사바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라는 한글 번역에는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는 믿음이 가득하다. 신비한 주문을 열심히 외워서 깨달음을 얻자는 믿음이 넘쳐난다. 이 말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은 깨달음이 없다는 말이다. 또 이 말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여기는 벗어나야 할 삼사라다. 현세상을 부정하고 이데아를 꿈꾸는 플라톤의 철학이다.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나온 번역이다. 반야심경의 전체 내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산스크리트어의 영어 번역을 보면 반야심경 전체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라는 반야심경의 뜻을 잘 품고 있다. 공하다, 얻을 것이 없다, 갈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하는 반야심경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다. '나'만 저 너머로 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무무명 역무무명진"에서부터 "일체고진실불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다.


아직 스승의 말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찾는 이는 이렇게 요약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기다린다. 스승이 왜 이렇게 내용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게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단 되뇌기 쉽게 핵심을 요약한다. 이미 자세한 뜻은 길게 앞에서 설명했으니 찾는 이는 요약된 내용의 본 뜻을 알고 있다. 요약을 반복하면서 가리킴의 본 뜻을 계속해서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하는 까닭은 앎의 본질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반복하면 익숙해진다. 익숙하면 문득 "아하!" 한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들 앎이라고 말한다. 물론 단순한 반복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할 때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뜻에 자꾸자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다. 이것이 만트라다. 이것이 살펴보기다.


위빠사나(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와 만트라는 본질적으로 같다. 같은 수행이다. 관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살펴보다 보면 앎이 일어난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다.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일어난다.



娑婆訶

사바하


사바하(薩婆訶, svāhā, Sanskrit: स्वाहा)는 산스크리트어로 어떤 주문을 말한 뒤 마무리하는 통상적인 말인데 여러 번역을 통해 나타나는 의미는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렇게 찾음의 본질과 수행의 본질을 살피며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는 이에게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 그 의도를 담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을 요약해서 찾는 이가 반복하기 쉽게 만든 말이다. 반복으로 오랜 믿음이 씻겨나가고 스승의 가리킴에 가슴이 열리도록 하는 말이다. 그렇게 문득 앎이 일어나게 하는 주문이다.


모든 헛된 믿음을 내려놓고 다시 보면 참으로 신비하게 앎을 일으키는 주문이며 당신의 가슴을 환히 밝히는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따로 다른 대단한 비법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이것만 집중하면 되는 주문이다. 그래서 능히 모든 오해와 믿음의 어려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특정한 문장이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체가 그렇다. 그렇게 공하다. 이 공을 통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본다.


이 주문을 문장으로 말하면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제목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 것이다.)


이미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뭘 얻을 필요도 건너갈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모두 있다. 이미 있는 그대로다. 중생에게는 없고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른다고 또, 안다고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여기 지금 모두 있기 때문이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따로 없다. 사물도 사물을 바라보는 '나'도 당신이 믿는 모든 다른 세상도, 극락도 지옥도, 모든 신들도, 브라흐마도 비슈누도 시바도, 정말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삼세제불이 정확히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눈을 떠라. 이 사실이 관세음보살이다. 이 진리가 관세음보살이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이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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