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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Feb 25. 2022

물질을 탐하면 죄가 될까요?

죄의 본질을 묻다.


"물질을 탐하면 죄가 될까요?" 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죄의 본질이 뭘까요?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겨서 살펴보지 않은 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살펴보면 죄의 본질을 보게된다. 죄의 본질을 바로 보면 죄에서 해방된다. 업보의 소멸과 원죄에서 벗어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먼저, 묻는 자신도 모르게 물음에 전제된 선입견이 있습니다. "정해진 죄가 있다."라는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정해진 죄가 있을까요? 정해진 죄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죄를 말합니다. 많은 문화와 종교에서 절대적인 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각 죄를 처벌과 연결시키는 '지옥'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어디든지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절대적인 죄"가 있을까요?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박정자.

정해진 절대적인 죄라면, 행위의 주체와 시간과 공간과 시점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죄여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역사를 거쳐 변함없이, 모든 문화권에서 죄라고 규정된 것은 없다. 찾아보라. 누가 '이것은 변함없는 절대적인 죄'라며 주장하는 예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예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순간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시에 죄가 아니라고 바라 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죄를 성립시키려면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이 만드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 일어나는 세상은 상대적인 세상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高下相傾,音聲相和,前後相隨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누가 좋다, 나쁘다 하는가? 에서 도덕경 2장 인용, 페이지 53


세상에는 '이런 저런 것'이 절대적 악이며 절대적 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가득하다. '절대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보통 '신'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쓴다. '신'이 정한 절대적 죄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이 오랜 세월 인간 사회 문화에 스며들어 있고 우리 모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절대적' 죄에 관한 관념에 물들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냉철하게 살펴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나 있는지. 누군가 무엇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이라는 그 사람의 주장'이지 절대적 사실이 아니다. 제발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마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은 없다. 죄는 죄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죄가 생간다. "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나의 시점이다. 무엇을 하든 내가 죄라고 생각하거나 누가 죄라고 얘기할 때 그 것을 내가 죄라고 받아들이면 '죄'가 된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이 본질을 깊이 알면 죄에 관한 모든 의문이 사라진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물질을 탐하면"은 하나의 마음 상태죠. 죄가 아닙니다. 물질을 탐하기 때문에 수많은 발견이 일어 났고 문명이 일어났고 과학의 발전이 일어났습니다. 물질을 탐하는 일은 좋은 면이 많습니다. '물질을 탐하는 일' 자체가 죄는 아니죠.

하지만 사회에서 법으로 "죄"라고 규정하는 물질을 탐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남의 가게에 있는 물건 (물질)을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내가 탐해서' 동의 없이 가져오는 '행위'를 법에서는 '죄'라고 규정하고 처벌합니다. 탐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지만 가져오는 행위는 그 사회 통념상, 또 사회 구성원들의 약속인 법에 정해진 죄가 맞습니다. 이렇게 죄와 처벌을 법으로 정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에 많은 사람이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죄라고 어떤 종교에서 가르친다면, 그 개념을 님이 받아들이고 죄라고 느끼면 죄이지, 그렇지 않으면 죄가 아닙니다.

죄는 아주 편리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같이 살아가려면 서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있습니다. 이러한 금지된 행동을 약속하는 데 죄는 아주 편리한 개념입니다. 어떤 행동이 왜 하면 안되는지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대신, "이런 행동은 죄야"라고 말하면 더욱 많은 사람이 쉽게 알아 듣습니다. 약속을 규정하는 법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질서를 강제하는 국가가 생기기 전부터 인간은 서로 금지해야 할 행동이 필요했고 그 약속을 "죄"라는 개념으로 서로 공유하며 살아왔기에 우리는 죄라는 개념에 더욱 익숙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따라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죄책감입니다. 내가 한 행위를 죄라고 여기면 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탓하는 감정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죄책감 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감정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에 익숙하고 이런 익숙함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규정하고 그 죄를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하면 사람들은 죄책감때문에 '죄'를 짖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비난하고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규정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사는 세상이면 늘 이렇게 죄를 규정하고 권력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정해진 죄는 없습니다. 선과 악, 좋고 나쁨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일을 놓고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좋고 나쁨이 나뉩니다. 이런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직접 살펴보고 죄의 본질을 바로 보면, 나를 속박해온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 스승들이 말하는 업장소멸입니다. 죄의 '공'함을 깨닫기에 업이 소멸됩니다. 원죄는 "죄"를 믿고 있는 나의 마음에 있습니다. 죄의 본질을 바로 보면 예수님이 가리키던 하나님의 나라에 눈을 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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