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능력에 관한 믿음이 잘 정리가 돼서 육신통(六神通, Abhijñā, अभिज्ञा)이라는 여섯 가지 신비한 초능력을 말한다.
신족통(神足通)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인데,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날고 벽을 통과해서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신이 가능한 능력이다. 천이통(天耳通)은 어떤 소리든 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인데, 아무리 멀리 있는 소리라도 듣고 다른 언어나 지방 말이든 다 알아듣고 동물의 말도 알아듣고 귀신같은 존재의 말까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타심통(他心通)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을 읽는 능력인데,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그 사람 자신도 잘 모르는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숙명통(宿命通)은 전생을 아는 능력인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전생과 과거를 훤히 알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구든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사람의 머릿속 기억까지 다 아는 능력이다. 천안통(天眼通)은 무엇이든 다 볼 수 있는 능력인데, 세상 어디든 막힘없이 다 볼 수 있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능력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능력은 오랜 수행 끝에 명상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사마디(Samādhi)를 통해서 얻어지는 능력으로 부처가 되기 전에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 능력은 누진통(漏盡通)으로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서 더는 환생하는 번거로움이 없게 되는 능력인데, 오직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부처가 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앞의 다섯 능력을 오종통(五種通)이라 하고 마지막 누진통과 구분해서 보는데, 오종통은 그냥 잡기로 치부한다. 부처가 이루는 누진통만이 최고의 능력이고 유일하게 얻어야 할 능력이라 말한다. 여기에 믿음을 넘어서 가리키는 스승의 해학이 있다.
다섯 가지 신통을 보면 요즘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서 나오는 능력들과 차이가 없다. 우리가 인간의 감각을 바탕으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이 다 들어있다. 수천 년 전의 사람이든, 과학 문명이 발달해가는 현대를 사는 사람이든 바라는 바는 다르지 않다. 삶이 힘들고 힘든 삶에서 느껴지는 한계가 뼈아프기에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기한 능력을 바란다. 이 신통들에 인간이 바라는 바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바람은 믿음으로 이어진다.
육신통의 근거는 사문과경(沙門果經)이라는 불교 경전이다. 출가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얻는 결실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석가모니가 답하면서 여섯 가지 능력을 언급했다고 전한다.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이 신통들이 정말로 있고 수행하다 보면 얻어지는 능력이라 믿는다. 석가모니가 직접 말했다고 하니 솔깃하지 않은가?
적지 않은 수행자들이 이런 능력에 마음이 빼앗겨 수행의 목적을 일단은 오종통의 수준으로 설정한다. 물론 다들 최상의 능력인 누진통을 마지막 목표로 남겨두지만, 일단은 그 과정에서 다섯 가지 능력을 얻고자 한다. 아니면, 누진통을 얻기 위해서 앞의 다섯 가지 능력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수행하다 보면 ‘나’의 능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나’의 능력을 얻으려 노력한다. 이런 능력이 명상을 깊이 해서 이르는 사마디의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말하기에 특정한 명상에 초점을 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이 멈추고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마디라는 정신 상태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불교라는 특정 종교에 한정된 것도, 종교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믿음은 어디에나 있다. 이야기만 다를 뿐이다.
경전에 나오는 다섯 가지 신통도 오랜 수련을 거쳐 높은 단계에 이르러야 이룰 수 있는 대단한 것이다. 오랜 수행을 해야 한다.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해서 집중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초보적인 단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해진 수행을 꾸준히 해야 한다. 환생의 이야기가 더해져 이번 생에서 몇 년, 몇십 년 하는 수행은 기본이다. 수많은 생을 거쳐서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지 그런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마지막 누진통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누진통은 당신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린다. 부처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모든 과정을 거쳐 누진통을 이룬 부처와 보살은 신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가 이룬 부처의 수준은 다른 보살보다 또 한 단계 위라고 묘사한다. 이거 뭐, 너무 대단해서 수행이나 시작하겠는가? 이런 믿음으로 절에 가서 부처상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게 된다. 누진통은 너무 대단해서 모자란 내가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주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수행자라 여기고 이런 과정을 간다고 믿는다. 언제 어떤 수준에 이를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믿음을 붙들고 오늘도 명상에 잠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사실은 누진통에 관한 것이다. 모든 자연인은 누진통을 완성했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이 끝나면 정확히 석가모니가 말한 누진통이 완성된다. 그 대단한 누진통이 완성된다. 석가모니 부처와 다르지 않다. 불교 신도들이 ‘믿는’ 석가모니와는 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석가모니가 가리킨 누진통과 다르지 않고 석가모니가 말한 부처와 다르지 않다. 만일 당신이 수많은 생의 수행을 요구하는 그런 대단한 과정을 믿고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는 부처의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도 수행하고 있다면, 여기서 바로 부처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겠다. 석가모니가 직접 말했다고 전해지는 그 경전에 석가모니가 숨겨 놓은 비밀이 있다. 둘러 갈 필요 없다. 수많은 생을 거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누진통을 이룰 수 있다. 누진통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이루어진다.
스승이 육신통을 통해서 가리키려 한 것은 오직 누진통이다. 그래서 스승은 다섯 가지 신통을 따로 구분해서 말하며, 이런 능력들을 보잘것없는 잡기로 치부하며 수행하는 가운데 나타날 수도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 말한다. 그 현상이 어떻든, 어떤 능력이든 누진통을 이루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에 경계하라고 말한다. 불교의 스승들은 경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스승 석가모니가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히 안다. 늘 그렇듯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힘든 삶 속에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믿고 갈구했다. 이런 믿음과 수행이 뒤죽박죽되면서, ‘나’의 능력을 향상해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스승의 가리킴을 오해했을 것이다. 스승 석가모니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이런 믿음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진리를 보는 일에만 힘쓰라고 육신통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가리킨 것이다. 그런 능력이 존재하고 당신이 그런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에 대한 믿음과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누가 와서 스승에게 “수행을 하면 미래를 보는 눈이 생기나요?”라고 물을 때 스승이 “지금 이 순간도 보지 못하는데 미래를 보는 눈 따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무엇이 있는지 보는 데 집중하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런데, 질문한 사람은 “부정하지는 않는 걸 보니 미래를 보는 눈이 있기는 한가 보군” 하고 받아들인다. 어처구니없이 보이지만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다들 오종통에 목을 맨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부분만 원하는 대로 듣는다. 아무리 스승이 가리켜도 오해하기 마련이다. 이를 잘 아는 뒤를 잊는 스승들이 이를 계속해서 일깨워준다. 오직 진리를 보는 일이 아니면 다 잡스러운 능력이고 수행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누누이 말한다.
수행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신기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스승은 이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기하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유혹이 엄청나다.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이런 경험이 수행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인 것만 같다. 좀 더 이런 경험을 향상시키면 뭔가 이루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은 함정이다. 수행의 척도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스승은 이런 경험을 큰 장애물이라고 말하고 집착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야 한다. 집착하도록 끌어당기는 위험한 일이기에 조심해야 한다. 어떤 경험도 배척할 필요가 없지만 집착도 말아야 한다. 누진통은 경험을 넘어서 있다. 경험이 아니다. 경험에 집착하지 말고 스승이 가리키는 곳을 보려 해야 한다.
아직도 “그럼 그런 능력이 있기나 한 건가?”라며 마음이 동하는가? 오직, 눈을 뜨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 하라. 그러면 능력이라는 개념의 본질을 바로 보게 된다. 다섯 가지 능력을 포함해, 세상 모든 능력에 대한 믿음이 발붙이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의 실체를 바로 보게 된다. 누가 있어 능력이 필요한지, 누가 있어 그런 능력을 얻을 수 있는지 바로 보게 된다.
누진통은 ‘내’가 얻는 능력이 아니다. 어디에도 능력을 얻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일이다. 어디에도 윤회하며 생을 반복할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일이다. 그래서 해탈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나’를 육체와 동일시하는 믿음이 사라지면서 어디에도 한계가 남지 않는 일이다. ‘나’와 세상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일이다. 세상과 구분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구와 태양과 은하와 우주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능력도 나의 능력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기에 다르게 바뀌어야 할 변화가 필요 없고 그런 변화를 일으킬 어떤 능력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일이다. 이 사실만 알면 된다.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나의 일이다.
당신은 혹시 이런 능력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수많은 사람이 자기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수행한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키우려는 일은 정확히 찾음의 반대 방향이다. 이 찾음에서는 어떤 능력도 얻을 수 없다. 심지어 이미 ‘내’가 갖고 있다고 믿는 능력들까지도 정말 당신의 것인지 묻는다. 미미한 당신의 능력들까지도 다 잃어버릴 것이다. 마침내 능력이 머물 수 있는 ‘나’마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안다면 도대체 무슨 능력이 필요하겠나? 어떤 능력을 원한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누구에게 필요한 능력인지. 우리는 그런 능력을 필요로 하는 ‘나’의 실체가 있기나 한지 깊이 살펴볼 것이다.
능력에 대한 믿음은 ‘나’에 대한 거짓 믿음을 강화하는 일만 한다. 능력에 대한 믿음은 당신 바로 앞에 있는 진리를 신기루처럼 만들어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찾음에 이런 기대가 녹아 있으면 찾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오늘도 이런 신기루를 좇아 자기 노력만을 탓하며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삶이라는 스승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상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3장 찾음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