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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Aug 27. 2021

무상과 무아의 뜻, 무지개로 가리키다.

세상 모든 것이 무지개와 같다고 말하는 가리킴이 "제행무상"이다.

무상(無常)은 지금 이 순간 세상 모든 것의 실체를 가리키는 스승의 가리킴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무상은 간단히 “상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나’와 세상의 모든 것이 각자 독립된 하나의 개체라는 의미로 ‘상(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상은 그 생각을 부정하는 말이다. 무상의 의미를 바로 알면 진리라고 일컫는 세상과 나의 실체를 바로 알 수 있다. 무상은 참 쉬운 말이지만 그 뜻이 익숙하지 않아 오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무지개로 쉽게 풀어 무상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상(無常)은 불교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데,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함께 삼법인(三法印)이라 부르며 불교 가르침의 핵심으로 여긴다. 제행무상은 보통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세상 모든 것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하며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기에 모든 것은 마치 꿈이나 환영처럼 실체가 없으며, 항상 불변(恒常不變) 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은 보통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쉬운 말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을 늘 보며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풀이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간 개념을 가져와 풀어 설명한 말이기에 스승이 가리키고자 하는 본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찾는 이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변하는 이 ‘것’의 실체는 뭔가"는 의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사실, 무상은 이 두 의문에 대한 답이다. 세상과 나의 실체를 가리키는 스승의 가리킴이다.

무상에 담긴 가리킴을 바로 이해하려면 찾는 이는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상식을 넘어 진정 스승이 가리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어려울 것 없다. 그저 무지개가 어떻게 생기는 지만 알면 그만이다. 저기 예쁘게 활짝 펼쳐있는 무지개가 제행무상의 의미를, 나아가 제법무아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맑은 날 폭포 물보라에 무지개가 펼쳐있다.

제행무상에서 제행(諸行)은 세상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행무상은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정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아닐 비(非)’ 한자를 써서 비상(非常)이라고도 말한다. ‘상(常)’은 나와 세상의 모든 것이 각자 고유의 성질을 가지는 독립된 개체라는 우리의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믿음이 오해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상이다. 무지개를 살펴보면 무상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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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의 한계로 전하지 못한 체계적이고 좀 더 깊은 해설을 만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무지개


어릴 적 무지개를 보면 참 예쁘다는 생각과 함께 저 무지개를 가까이서 보고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저 무지개가 시작하는 그곳에 빨리 갈 수만 있다면 무지개를 만져보고 무지개를 밟고 올라가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운이 좋게 그곳이 있는 사람은 무지개를 직접 만져 봤을 것 같아 부러웠다. 아마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선녀들이 깊은 산속 물 맑은 계곡에서 목욕하기 위해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고 중국의 한 지역 사람들은 연못의 물을 하늘이 빨아들이면서 무지개가 생긴다고 믿기도 했고, 말레이반도 원주민들은 무지개를 거대한 뱀이 하늘에서 물을 마시러 내려온 것으로 믿었다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무지개를 인격화 한 신 이리스(Iris)가 등장하는데, 여러 신들의 메신저 역할도 하고 신들이 중요한 서약을 할 때 강에서 물을 나르는 일도 한다고 말한다.

여기 무지개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믿음은 무지개가 하나의 물리적 사물이라는 생각이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에 직접 만져 볼 수 있고 밟고 지나갈 수 있는 다리 같은 어떤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무지개가 하나의 ‘상(常)’이라는 믿음이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 사람들은 빛의 굴절과 반사 현상을 이해하기에 더는 무지개를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서 프리즘을 들고 실험해보며 빛의 굴절 현상을 배우기에 다들 무지개가 어떻게 생기는지 안다.

무지개의 설명을 요약하면, “무지개는 공기 중에 떠 있는 수많은 물방울에 햇빛이나 달빛이 닿아 물방울 안에서 굴절과 반사가 일어날 때, 물방울이 프리즘과 같은 작용을 하여 빛이 분산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양과 관측자를 연결하는 선을 연장한 방향을 중심으로 시반경 40~42°로 나타나며, 안쪽이 보라색, 바깥쪽이 빨간색으로 배열된 햇빛 스펙트럼이다.”

무지개는 빛이 굴절되는 특정한 각도 부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지, 내가 보는 저 무지개의 시작과 끝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무지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개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무지개는 빛과 물방울, 그리고 그 순간 특정 장소에서 굴절되어 나오는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무지개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해가 나오면 폭포 물보라에 굴절/반사된 빛이 전망대에 있는 나의 눈으로 들어오고 나는 "무지개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지개는 하나의 현상이지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누가 무지개를 빨리 뛰어가면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 웃긴 사람 취급하거나, 진지해 보이면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린아이라면 귀엽게 봐줄 거다.


무지개는 현상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무지개는 그 순간의 현상, ‘일어남’이다. 빛과 물방울들과 굴절과 반사 현상과 굴절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보고 인지하는 사람과 함께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상’이 아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무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무상(無常)


세상 모든 것이 다 이런 무지개와 같다고 말하는 스승의 가리킴이 바로 “제행무상”이다. 우리가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경험되기에 그렇다고 믿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실체를 깊이 살펴보면 무지개와 같이 다른 것들의 반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고유의 성질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것’의 실체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과 같은 말이다. ‘색(제행)’의 실체는 ‘공하다(무상)’는 말이다.


어떤 것이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것’의 실체는 주변 다른 것들의 반영이다. 또 그 다른 것들도 각각 다 그렇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나아가기에, 하나의 '것'은 세상 모든 것들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각각 다른 모든 것의 반영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은 각각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고 각자의 존재를 따로 말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스승 싯다르타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라고 말했고 이 가리킴을 ‘연기(緣起)’라고들 부른다. 이것을 형상화 한 가리킴이 아타르바베다(Atharva Veda, अथर्ववेद)에서 유래했다 하는 인드라의 망(Indra’s net, Sanskrit Indrajwāla)이다. “세상이란 무수히 많은 보석들이 서로 엮여 있는 그물망인데, 보석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보석의 반영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설명할 수 있어요. 각각의 보석은 하나의 사물-사건이고 하나의 사물-사건과 다른 모든 사물-사건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스승 라메쉬 발세카의 이 말은 인드라의 망을 일컫는 말이다. 인드라의 망의 가리킴은 반야심경의 핵심인 관세음보살의 가리킴과 다르지 않다. 인드라의 망이 인격화되면서 형상화된 것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다. 어떤 것도 존재를 말할 때 다른 모든 것과 둘로 나누어 말할 수 없기에 “둘이 아니다. 불이(不二)”라고 하거나 하나님이라고 일컫는다. 표현 방식은 다르나 담고 있는 의미는 다르지 않다.

라메쉬의 책, A NET OF JEWELS 표지에 인드라의 망이 표현되어 있다.


제행무상에서 이 ‘제행’을 모든 ‘것’, 즉 사물(개체)을 말한다고 설명했지만, 사물 대신 사건으로 풀이해도 된다. 하나의 사건은 주위 다른 모든 사건에 영향을 받고, 그 다른 모든 사건 하나하나는 또 주위 다른 모든 사건에 영향을 받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면 하나의 사건은 세상 모든 사건의 반영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사물로 제행무상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 사건의 연관성으로 제행무상을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에게는 연기나 인연처럼 제행무상의 설명이 사물보다는 사건의 인과관계로 풀은 설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무아(無我)


무지개를 생각하며 세상을 살펴보다 보면 제행무상의 뜻이 깊이 다가올 것이다. 열정을 가진 찾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세상의 무상함을, 공함을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세상 모든 것에서 ‘나’는 쏙 빼고 예외로 두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무상하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여전히 어떤 ‘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은 내려놓지 못한다. ‘나’는 변하지 않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서 파생된 생각들이 영혼이나 환생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믿음을 ‘에고’라고 부르기도 하는 데, 세상에 대한 이해는 깊으나 에고가 강한 이는 때론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신이나 신의 사자라는 믿음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의 무상함을 이해하지만 ‘나’의 무상함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찾는 이가 스승에게 도움을 구할 때, 스승은 제행무상의 방향을 틀어 찾는 이에게 말한다. “너 또한 제행의 일부이기에 무상하니라.” 제행무상을 돌려서 찾는 이를 직접 가리키는 가리킴이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나’ 또한 예외 없이 무상하다는 말이다. ‘나’라고 할 ‘상’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진 ‘나’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말이 바로 ‘무아(無我)’다. ‘나’ 또한 모든 것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나’라고 할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하나의 일어남이다. 세상 모두를 반영하며 일어나는 ‘나’다. 그래서 급기야 “세상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겉으로는 구분 지어 다른 사람과 사물들과 구분되어 독립된 ‘나’로 경험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실체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무지개가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보이지만 그 실체는 다른 모두를 반영하는 현상인 것처럼 ‘나’또한 그렇다는 말이다.


고(苦)


찾는 이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이해하려 할 때 기존의 오해나 믿음 때문에 부딪히는 모든 장애를 가리켜 일컫는 말이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와 같은 스승의 가리킴을 도구 삼아 오해와 믿음을 하나씩 살펴보며 내려놓는 과정이 찾음이고, 모든 오해와 믿음인 일체개고를 넘어 스승이 가리키는 진리를 바로 보는 일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도일체고액”의 뜻이다.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 지금 바로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는 일이다.


진리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저 무지개가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과 나를 살펴서 그 실체가 무지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그뿐이다.


부디 도움이 되기를,

2021. 8. 23.

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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