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In to the Unknown! 이 뭣고?
우연히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왜 자석은 서로 밀어내나요?"라고 묻는 질문자에 답하는 영상을 보게 됐다. 세상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이 대단한 과학자의 답을 듣다 보니 너무도 당연한 믿음에 갇혀있는 찾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글을 적어본다. 이미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책 전반에 걸쳐서 다양하게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저명한 과학자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의 말을 전해 들은 세상 사람들은 "안다."라고 말하는데, 정작 그 사실을 전해준 과학자는 "모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잘 드러나는 사실은 앎이 깊어질수록 정말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을 넘어 앎의 본질이 드러난다. 여기서 찾는 이는 화두라고 일컫는 의문의 본질을 바로 알고 찾음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의문 아래 믿음을 가리키다.
한때 삿상에 앉아서 골돌이 생각하던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삿상의 주제와 맞지도 않아 보이고 스승 웨인도 전혀 관심 없어 보이던 그 의문을 나는 골돌이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난 마루 위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지? 내 엉덩이가 방석과 마루를 뚫고 지나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또는 엉덩이가 방석과 마루가 뭉개지며 하나가 되지 않고 마루 위에 깔린 방석 위에 앉아 있을 수 있지?
도대체 왜? 도대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세상 엉뚱한 소리 같지 않나?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생각하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다. 아마 대부분에게는 이런 말이 생각할 가치도 없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혹, 당신도 이런 이상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 해봤지만 은근히 이런 것이 궁금했다면 아마 이 글이 반가울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눈이 번쩍 뜨일지도 모르겠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원자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면 나의 의문이 그렇게 엉뚱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를 과학자들은 원자(Atom)라고 부른다.
당신이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하자. 당신의 엉덩이가 의자와 합쳐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며 앉아있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엉덩이나 그 위에 입은 옷이나 의자는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 당신의 엉덩이와 옷과 의자 모두, 당신이 숨 쉬는 공기도.
그런데 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모든 원자는 그야말로 텅 비어있다. 얼마나 텅 비어 있을까? 원자를 축구장 만하게 확대하면 축구장 가운데 작은 콩 하나가 있고 그 콩 주위에 먼지가 단지 몇 개 날아다닌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 그 가운데 콩이 원자핵이고 주위 먼지가 전자다. 먼지가 날아다니는 범위가 원자의 크기다. 그럼 원자핵이나 전자는 단단할까? 아니다. 이들도 텅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렇게 텅 비어 있는 원자들이 모여 당신의 엉덩이를 구성하고 옷과 의자를 구성한다. 그야말로 엉덩이도 의자도 텅 비어있다. 어떻게 이렇게 텅 비어 있는 물체들이 뭉개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며 앉아 있다는 현상을 만들어 내는지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 이 텅 빔들이 만나 뭉개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더 이상 하지 않을까? 만일 크게 확대해서 볼 수 있다면 아마 텅 빈 공간만 보이지 부딪히는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거다. 사실 부딪히는 부분은 없다. 영화처럼 앤트맨이 퀀텀 수준으로 작아져서 이렇게 엉덩이와 의자가 만나는 부분에 있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텅 빈 우주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일 거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과 의자를 구분하면서 앉아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현상을 경험한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나? 내 의문에 공감이 가는가?
사실 이런 의문은 세상의 실체에 관한 의문이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어떻게 세상의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도대체 이런 의문을 갖는 나의 존재는 뭔지를 묻는 의문이다. 결국 모든 찾는 이가 갖는 의문이다.
나는 이 의문에 손에 잡히는 답이 있을지 알았다. 분명 과학자들이 답을 이야기해 줄 것만 같았다. 물론 과학자들은 답을 준다. 전자와 전자기력으로 설명하고 또, 기본입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답을 준다. 그런데 이런 물리학의 개념을 더 깊이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없다. 과학이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답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과학이 아니면, 영적 스승이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삿상에서 앞에 앉아있는 스승이 내게 답을 말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속 시원히 답을 말해주지 않는 스승 웨인이 야속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웨인에게 질문을 하면 늘 의문으로 되돌아왔다. 속 시원한 답은 없었다.
아빠, 왜 우리는 팔이 두 개 밖에 없어?
많은 사람들이 "왜?" 또는 "어떻게?"라고 묻는다. 삶에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다. "왜 살지?"라고 묻는다. 삶의 목적이 뭔지 묻는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왜?"라고 물으며 답을 찾고 전문가들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해댄다.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답을 하나 붙들고 사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다들 "왜?", "어떻게?"를 물으며 정해진 답을 기대한다. 분명 내가 몰라서 그렇지, 정해진 답이 있다고 믿는다. 전문가들이 그 답을 찾아 준다고 믿는다. 과학이 이런 답을 찾아낸다고 믿는다. 아니면 철학이 결국 궁극의 답을 찾아낼 거라고 믿거나 종교가 궁극의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또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답을 찾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일까?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도대체 '답'이 뭘까? "답을 찾는다는 것"이 뭘까? 우리의 의문이 답을 찾을 수 있는 의문이기나 한 걸까?
천재 물리학자라고 하는 리처드 파인만이 이 문제를 아주 잘 설명한다. 왜 스승에게 답을 기대하고 물을 때 늘 의문으로 되돌아오는지도 엿볼 수 있다. 물리학자의 이야기이지만 어떤 선 스승 못지않게 물음의 본질을 잘 가리킨다.
먼저 아래 영상을 꼼꼼히 보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과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이야기의 요점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영상을 보고 글을 이어 읽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3smc7jbUPiE
"왜 자석은 서로 밀어내는가?"라는 질문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고 천재 물리학자라는 명성보다 물리학을 쉽게 설명하기로 더 유명한 리처드 파인만 교수가 "왜?"라는 질문의 본질을 아주 쉽게 잘 설명한다. "왜"라는 질문의 본질뿐 아니라 이 설명을 통해서 당신이 믿는 모든 지식의 본질 또한 엿볼 수 있다.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많은 이가 파인만의 말을 오해하는데, 파인만이 질문자가 물리학에 지식이 없어서 깊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왜?"라고 물을 때는 질문자가 수긍하는 범위 내에서만 답이 통하지, 궁극적으로는 어떤 답도 할 수 없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파인만은 아는데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이 글을 쓰는 까닭도 많은 이들이 파인만의 말을 오해하듯이 찾는 이들도 스승의 말을 오해하기에 그 오해를 바로 풀고자 함이다.
이런 과학자들의 말을 여러 다리 건너서 전해 들은 당신은 "당연하다."라고, "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준 과학자는 "모른다."라고 말한다.
여전히 안다고 믿는가?
무엇이든 "왜?"라고 물으면 수많은 수준에서 답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깊이깊이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답을 할 수 없는 수준에 닿는다. 답은 질문하는 사람이 이미 알고 있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로만 설명할 수 있기에 거기서 더 내려가서 왜라고 물으면 더는 답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때는 오직 가리킬 수만 있다.
영적 찾음에서 우리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지나 깊이깊이 존재의 밑바닥을 묻는다. 모든 사고와 언어의 근원을 묻기에 기존 사고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답은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너무나 선명한 답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답이 아니다. 그래서 스승은 가리킨다.
그래서 묻는다 "이 뭐꼬?"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 어떻게 의자와 엉덩이가 서로를 정확히 적당한 힘으로 밀어내서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의자와 엉덩이가 하나로 뭉개지지 않고서? 또 일어설 때 앉기 전의 매끈한 바지와 엉덩이 그대로의 형태를 가지면서.
늘 일어나는 일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해 보이지만, 이 당연한 사실이 그렇게 당연하지가 않다. 리처드 파인만은 우리는 아직 왜 그런지 모른다고, 또 왜라고 물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그런 거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렇게 뭘 모르는지 아는 지식인이 진정 많이 아는 지식인이다. 뭘 아는지를 말하기보다 뭘 모르는지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깊이깊이 알아야만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답이라고 붙들고 있는 모든 답을 살펴보라. 그 답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모름'에 도달한다. 모든 답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알게 된다. 모든 답이 공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공함을 알게 된다. 앎의 본질을 만난다.
시제법공상
(是諸法空相)
일반적인 상식으로 당연히 안다고 여기는가?
가만히 들여다보라. 자신의 모든 앎을 들여다보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모든 앎의 바닥에는 모름이 있다.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의 밑바닥을 보면 다 모름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모든 앎은 공하다.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진정한 찾음이 시작된다.
이렇게 앎의 본질을 만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뀐다. 우리가 익숙하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일들이 하나같이 기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현상이 기적이다. 기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현상을 일컫는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안다고 믿는 착각을 걷어내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기적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기적이라고?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라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이 기적이라고?" 내게는 그런 기적보다 지금 어떻게 이렇게 내 손이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현상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기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화면에 찍힌 글을 읽고 인식하는지, 또 그 인식을 바탕으로 계속 새로운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써나가는 현상이 일어나는지 기적이다. 어떻게 수조 개의 세포들이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이루며 조화롭게 생명이라는 현상 만들어내는지 기적이다. 물방울이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고 잎새에 붙어있다. 아, 기적이다. 잎새에서 풀잎 향기가 난다. 저 풀에서 분자가 흩어지며 향기로 전해지고 인식되고 생각이 일어나고 또 반응하고, 설명하는 이야기가 어떠하든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다. 세상은 기적이다.
또한 반대로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에 더는 속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기적이기에 더는 특별한 기적이란 없다. 다 같은 평범한 일이다.
In to the Unknown!
모름의 실체 속으로..
과학은 일어나는 현상의 패턴을 찾는 일을 한다. 현상 자체에 관한 의문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과학은 여기서 멈춘다. 그리고 과학이 멈춘 곳에서 진정한 찾음이 시작된다. 그래서 묻는다. "이 뭐꼬?"
"이 뭣고?"라고 물으려면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상식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온 모든 자신의 지식을 의심하고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욺 켜진 모든 답을 파헤쳐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앎의 본질에 도달한다. 모름에 도달한다. 자신의 앎의 실체가 모름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때 바른 의문이 세워진다. 비로소 "이 뭣고?"라는 진정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진정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뭐지?". 모르기에 묻는 것이다. 모름에 머물며 묻는다. 이것이 화두다. 진정한 찾음이다.
모든 "이 뭣고?"에 대한 의문은 찾음이 끝나면서 결국 다 풀린다. 오해하지 마라, "답을 찾는 다"는 말이 아니라 "의문이 풀린다."라는 말이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극과 극의 차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우리가 익숙한 개념으로 "이 뭣고?"를 설명하려 '에너지와 움직임'(356쪽)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과학이 멈춘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기 위해서 그 글이 쓰였다. 그리고 '꿈과 현실 (372쪽)'이라는 글에서 익숙한 꿈의 비유로 '이 뭣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책의 설명은 당신에게 주는 답이 아니다. 모든 설명은 당신이 움켜지고 있는 당신의 믿음을 가리켜서 직접 살펴보고 그 편견 속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하는 가리킴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리킴을 따라 자신의 믿음을 바로 보고 편견을 벗겨내다 보면 문득 모든 앎과 모름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 이때 모든 의문이 풀린다. 왜냐하면 질문이 틀렸다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의문이 기대어 있던 전제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게 되면서 의문들이 저절로 무너져 내린다. 더는 어떤 의문도 없다. 완벽한 앎과 모름의 실체가 드러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실체가 드러난다. 세상과 나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 실체를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고 불렀다. 라메쉬는 참의식이라고 불렀다. 니사르가타 마하리지는 "나는 그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예수는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자는 도라고 불렀다.
이렇게 실체가 드러나는 일을 우리는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더는 찾을 것이 없기에 찾음이 끝난다고 말한다.
찾는 이가 물으면, 스승은 다시 파인만 설명처럼 모름으로 돌아가서 가리킨다. 질문하는 이의 질문에 담긴 전제를, 오해를, 믿음을 가리킨다. 질문하는 이가 안다고 여기는 그 믿음을 가리키며 올바른 의문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In to the Unknown.
When Enlightenment happens,
Unknown doesn't turn to Known.
Instead, the true nature of Unknown and Known reveals.
세상에 우리가 정말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자기가 안다고 여기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라.
그 앎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라.
내 앎의 실체가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