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만 스쳐도 인연
1편에 이어..
이튿날 아침 일찍 깨어 예정된 일정을 준비합니다. 두 번째 날의 첫 일정은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애월 숲 산책'입니다.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숲을 걷는 체험이라는 문구에 끌려 무작정 예약을 했어요. 저와 에어비앤비 호스트, 그리고 신혼여행으로 제주를 찾은 커플분들까지 해서 네 명이 오늘의 산책 메이트였습니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니 찌뿌둥했던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더라고요. 호스트분께서 찍어주신 사진으로 인생샷도 남기고,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신 모닝커피와 함께 여행 이야기, 역사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정말 뜻깊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 호스트분께서 근처 식당 추천까지 해주셨지만, 사람들이 붐빌 시간인지라 점심은 맥도날드로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다음 일정은 조천읍에 위치한 함덕해수욕장입니다. 전날 들렀던 협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더군요. 협재해수욕장이 조금은 소소한 바다의 매력이라면 함덕은 본격적인 관광지의 느낌입니다. 바다 바로 앞에 카페라던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고, 공중화장실, 샤워장 등의 시설들도 부산의 바다처럼 제대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저도 이번에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차에서 내려 바다에 발을 담가보았어요. 아직은 조금 차가웠지만, 제주도에 와서 바다를 직접 만져보지 않고 돌아가기는 어쩐지 아쉬웠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니 저처럼 바다를 직접 피부로 느끼는 사람, 백사장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여행을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겠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일상은 잠시 잊어두고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겠죠. 에메랄드색이 가장 예쁜 함덕해수욕장에서, 저도 순간의 기쁨을 최대한 누리다가 왔습니다.
함덕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춘서점’이라는 독립서점이 있습니다. 원래는 함덕해수욕장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서우봉’을 오를까 했지만, 조금 지쳐있었던 터라 편한 길을 택하기 위해 기념품도 살 겸 가게 되었어요. 만춘서점은 하얀색 작은 건물인 1호점과 붉은 벽돌 건물인 2호점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호점에서 ‘오름오름’ 이라는 제주 오름을 소개하는 책을 구매하며 인상 좋은 사장님께 추천하는 제주 여행지가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근처의 카페와 밥집, 그리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름까지, 제가 산 책의 별책부록으로 따라온 지도에까지 표시해주시며 열정적으로 알려주셨어요. 저는 이쯤에서 제 자신에게 조금 놀랐는데요, 평소에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지라 가게에 들어서면 물건을 사는 것 이외에 말은 전혀 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었어요. 큰 용기가 필요했던 질문에 성의껏 답변해주신 사장님께도 (그 마음을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사장님의 글씨까지 더해져 ‘리미티드 에디션’이 된 책을 가지고 다시 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추천받은 카페로 내비게이션을 찍어봅니다.
구좌읍에 위치한 ‘카페 공백’으로 향합니다.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곳이라 제가 갔을 때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음료를 마시며 쉬기도 하고 바다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더라고요. 이곳은 첫인상부터가 ‘인스타그래머’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있는 외벽이나 안에서 흘러나오는 ‘힙스러운’ 음악, 그리고 야외 공간의 포토존도 그렇고요. 특히 별채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잠시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해보았습니다. 한 바퀴를 슬쩍 둘러본 후 다음 일정을 향해 차를 몰아갑니다.
또 다른 바다인 김녕해수욕장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협재와 함덕에 비해 작고 조용한 해변이었어요. 저는 왜인지 이런 곳이 좋습니다. 여행 두 번째 날에 여러 곳들을 잠깐씩 둘러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함덕해수욕장이나 카페 공백보다는 소소한 숲 산책이나 이곳 김녕해수욕장이 더 인상 깊은 공간이었어요. 제 스스로가 워낙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고, 코로나 이전 시절에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익숙했던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그렇기에 나만 아는 매력이 있는 공간이 저는 좋습니다. 만약 제주도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니었다면, 제 성격상 그저 한 군데 머무르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제주도가 어떤 곳인지 훑어보는 ‘튜토리얼’과 같은 목적을 지닌 여행이었기에 그렇게까지 무리하진 않았던 것이죠. 다음번의 제주 여행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곳을 찾아서 ‘제주의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해물라면이 먹고 싶었기에, 급하게 근처의 라면 집을 검색했고, 마침 멀지 않은 위치에 위치한 ‘바보라면(‘바다가 보이는 라면’의 줄임말이더군요)’이라는 가게를 찾았습니다. 평대리 근처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서 웃으며 맞아주는 사장님이 있습니다. 가게 내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주시며 맑은 날에는 바다 풍경이 더 좋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저도 전날과는 달리 흐린 날씨가 조금 속상하다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해물라면의 맛도 좋고, 무엇보다 가격이 제가 알아본 다른 라면집보다 저렴했어요. 사장님의 기분 좋은 친절도 매우 좋았던 곳입니다. 사장님께서 껍질에 상처가 나서 상품가치가 없는 한라봉 하나를 맛보라며 서비스로 주셨는데, 어쩌면 한 번 스치고 말 인연일지도 모를 여행객들에게 베풀어주는 마음씨가 감동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음번의 여행을 오더라도 다시 찾지 않을까 하는, 가게였습니다.
몇 군데의 일정을 더 진행할까 했지만 아직 여행의 이틀째이고, 다음 날도 아침부터 일정이 있었으므로 슬슬 해질 때쯤에 맞춰 숙소로 향합니다. 둘째 날의 숙소는 성산읍에 위치한 ‘산들애풀 하우스’입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했고, 외진 위치에 있는 곳이지만 사장님이 매우 친절하고 숙소도 넓고 깔끔하다고 하는 평가를 보고 예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용공간에 있는 ‘간식 창고’가 좋았는데요, 짐 정리와 여행 사진을 정리하느라 밤늦은 시간이 되자 출출했던 저에게 딱 알맞은 간식거리들이 있어서 따로 편의점을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숙소인 탓에 아침에 일어나서 정원을 걸을 때의 공기도 좋았습니다. 아침에 정원 청소를 하고 계시는 사장님과 나눴던 여행 이야기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하는 여행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여행에서는 최대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그 시간에 나를 돌아보는 것에 집중하고자 노력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제주 여행, 특히 이 두 번째 날의 일정을 통해 느낀 것은, 짧게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어찌 됐든 타인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제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시고 공감되는 대화를 이끌어주셨던 숲 산책의 호스트 분과 신혼부부 분들, 여행을 좋아하신다던 만춘서점의 사장님, 날씨가 좋을 때는 바다가 더 예쁘다며 바다를 마치 자식처럼 흐뭇해하시던 바보라면의 사장님과 혼자 여행 오시는 게 대단하다고 말씀해주셨던 산들애풀 하우스의 사장님까지. 낯선 이에게 베푸는 친절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 또한 알기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느라 돌보지 못한 제 주변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고 조용히 혼자 쉬다가 오려던 계획은, 두 번째 날의 사소하지만 깊은 인연으로 무너졌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한 번 마주치고 끝날 사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제주도를 다시 찾게 될 것이고, 한 번쯤은 제가 좋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다시 오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집에 이제 만 1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알아봐 주는 단골 밥집이나 카페가 몇 군데 있어요. 한 번 만난 사이인데도 웃음을 아끼지 않았던 제주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저를 매번 알아봐 주시고 저만의 메뉴를 알아서 척척 주문해주시는 단골집의 사장님과 직원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상과 비일상(여행)은 반대말이 아니라, 이런 의미에서는 상호보완적인 뜻의 단어 같아요. 저는 일상에서 비일상의 소중함을,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순간에 다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흔한 것은 평범하지만, 평범한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님을,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저에겐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 일하는 시간도 소중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누워서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며 웃는 시간도 소중합니다. 그렇게 당장 느끼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된 날이었습니다. 세번째 날의 비일상에는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제주 여행기는 3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제주 여행기 3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