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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사 Nov 28. 2021

1년 간 인터뷰를 하면서 들었던
가장 특별했던 대답

당신에게 좋은 삶이란?

스터디언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내가 마지막에 늘 하는 질문이 있다.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인터뷰이들 모두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전문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대답이 늘 다르다. 도전, 꾸준함, 성장, 믿음, 사랑... 정답은 없다. 그분들의 인생의 궤적에서 인터뷰 시점이 어떤 때였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답이 그때의 그분 삶을 반영한 것이라 의미 있으면서도, 그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답은 이것이다. "함께 잘 사는 것"대답이 꼭 같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그랬다. 인생의 고민이 내가 잘 사는 것에서 '남들도 함께' 잘 사는 것으로 넘어갔고,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저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책을 읽으면서도 '남들도 잘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진 주인공이나 저자를 만날 때 그런 마음이 든다. 최근 읽은 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주인공, 케인스가 그렇다. 



그러면 '함께 잘 산다'는 말의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일단 우리의 욕구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케인스는 에세이에서 1)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욕구와 2) 우리의 기분을 고조시키고, 스스로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하는 반 필수적인 욕구를 구별했다. 이 두 가지 욕구는 <권력의 원리>에서 말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1) 전 및 2) 자존감의 욕구- 와도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실존적 딜레마에 대한 두 가지 방어책을 늘 갈구한다. 첫째는 나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한순간에 전멸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 둘째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한 내가 한 개인으로서 가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확신. 이 두 가지 기본적인 동기를 충족하는 데 있다. -<권력의 원리>, p. 84


"우월감을 가져다주는 후자는 사실 충족될 수 없을지도 무른다."는 케인스의 말처럼 자존감의 욕구를 모든 사람에게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내 주위 누군가와의 비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기 쉽고 이렇게 차이를 만드는 불평등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에 대한 욕구는 다르다. 자존감에 대한 욕구는 인식에서 오지만, 안전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의 불안정성에서 온다. 이 말은 누구나 부를 누리며 즐기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안정이 보장된 삶을 말한다. 케인스는 이런 관점에서 그렇게 실업률을 낮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의 삶의 안전은 즉각적으로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이 그들의 정치, 경제 시스템에 기대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바로 젊은이들과 다른 모든 국민에 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가 주어지는 것이죠. 안전이 필요한 사람을 안전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수에 대한 특권을 종식시키는 것이고, 모두에게 시민의 자유를 보전해주는 것입니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p. 466-467
케인스는 문제가 사실은 훨씬 더 간단하다고 믿게 되었다. 파시즘의 근본 원인은 실업이었다. 실업은 쉽게 무력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과 분노의 근원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p.523
하지만 케인스는 또한 20세기의 경제 문제가 자원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경영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디플레이션은 생산 부족이 아닌 금융 불안과 불확실성에 의해 일어났다. 1926년에 있었던 영국의 총파업과 히틀러의 부상은 해결되지 않는 비참한 국내 상황에 대한 급진적인 해결책을 찾는 절망적인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들이 겪은 고통의 원인은 비교우위에 대한 이해 부족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즉 근로자들
의 해고와 폐업을 낳은 물가 하락 때문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p. 524


하지만 케인스가 강조했던 실업률은 '절망적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 보다는, '경제적인 규칙 혹은 수치'로 인식되어왔던 것 같다. 미국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만든 필립스 곡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상충관계가 있다는)이나, 물가를 낮추기 위해 가격을 통제하거나 금리를 인상하는 등의 해법이라고 생각했던 방법들이 통하지 않게 되었을 때 케인스주의는 실패했다고 공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말하는 케인스는 실업률을 도구나 목적 그 자체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하고, 빈곤은 싸워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았다. 자연보호라는 조치가 필요한 이유는 비협조적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무언가를 너무 과도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처럼 그래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실업률을 낮춰야 한다고 한 것이다. 


실업률을 낮추자는 것은 언뜻 보면 좋은 말인데 왜 케인스주의자들 내에서 오해와 다른 해석이 나오고, 케인스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았을까? 책 한 권을 읽고 케인스를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케인스주의자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좋은 삶, 좋은 사회"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내린 것 같다. 이 사람들을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미 안전에 대한 욕구가 해결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두 가지 욕구 중 후자,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전자인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통제하는 힘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욕구는 다르다. 살아온 맥락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정답은 없다. 모두를 위해서 아무리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해도 대의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상을 공유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면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서로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싸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원리를 이해해보면 어떨까. 케인스가 일관적으로 강조한 것은 두 가지 원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1.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만약 베를린이 무너 진다면 뉴욕을 포함한 모두가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본위제로 연결된 달러화와 글로벌 경제 질서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p. 319


2. 불확실성

내가 말하는 '불확실한 지식'이란 그저 확실히 알려진 것과 가능성이 있는 것을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룰렛 게임은 불확실성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불확실성은 유럽의 전쟁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하다거나, 20년 후의 구리 가격과 금리, 또는 1970년에 새 기계의 노후화 정도나 부자의 개인 재산 정도를 말한다. 이런 문제들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수리적 확률을 도출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 즉 그런 것들은 알 수가 없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p. 590-591


20년 후의 구리 가격이나 금리가 불확실한 것처럼, 지금 내가 부자라고 해도 20년 후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삶'에 대한 정의는 모두가 다르지만 다르다고 끝낼 것이 아니라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공감이 필요하다. 내가 사는 삶과 남이 사는 삶은 결국 공존한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케인스가 영국 대표단 보고서에 케인스가 정리한 문장이 잘 말해준다. 


"독일의 젖을 짜내려면, 일단 독일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케인스는 학부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런 좋은 것들이 배타적이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림을 그리는 자의 즐거움이 그림을 감상하는 자의 즐거움을 해치 지 않는 것처럼, 좋은 삶을 사는 자가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또 다른 자의 능력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p. 232
케인스가 좋은 삶의 구성 요소로 여기는 윤리는 케인스를 유명하게 만든 경제학 분야보다 공공정책에 더 중요한 고려 요인이었다. p. 236
그는《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혼동해서 좋은 삶을 추구하기보다 “돈에 대한 애정”에 소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대한 예술과 아름다운 저녁을 즐기는 대신 은행 잔고를 살피고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은데도 단지 부를 과시할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는 것이다. p. 399
좋은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은 좋은 정신 상태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는 것과 관련돼 있었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좋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였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기본적인 권리가 아니라 물질적인 현실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p.467-468


결국 '좋은 삶'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누가 잘되면 나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닐까? 나는 "좋은 삶"을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려본다. 공감이 되면 변화는 자연스럽게 만들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처음 "함께 잘 사는 것"이 삶의 가치라고 언급했던 한 커피 제조업체 대표님은 르완다 내전으로 고통받았던 르완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르완다 커피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중남미 커피 농장에서 부모님들이 일하는 사이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작은 학교들을 만들고 계신다고 하셨다. 자기 혼자 하는 일은 아니라며 자신의 노력을 작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도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나눌 수 있을까? 


일이 제대로 되려면 모두가 함께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케인스는 알았다.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가족과 친구들이
사랑하는 이를 구하려고 함께 발 벗고 나서는 것처럼
시민들 모두가 사회가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앞장서야 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p.269

참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 재커리 D. 카터

<권력의 원리>, 줄리 바틸 라나, 티치아나 카시아로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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