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Jun 13. 2023

비조직형 인간의 기묘한 조직생활 3편

왜 그만뒀을까? (2부)

들어가며

개인경험은 필연적으로 이기적 편향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영지'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솔직하게쓰되 너무 이입해서 편협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영지"는 누구람? 하는 분들께 미리 양해말씀 전합니다. 




짧은 통화였지만 휴대전화를 대고 있던 영지의 귀에 열이 올랐다. "업무 지시하는데 태도가 왜 그래요?"라는 사장의 지적에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기분이 엉망이 된 영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태도 지적이냐고 바로 대꾸했어야 했는지 혹은 시간을 거슬러 자기 행동을 짚어봐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런 영지에게 론칭 행사 담당자는 제품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을 해결하라 독촉했다. 영지는 우선 일이 되게끔 하자고 결론짓고 정리되지 않은 기분을 후다닥 접어 마음 한켠에 넣어두었다. 


단 하루의 행사였지만 매출이 천만 원이 넘었다. 초대받은 주요 업계 관계자들은 제품 출시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지갑을 열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휴대용 카드 결제기에서 뱀처럼 길게 출력된 판매영수증을 보며 영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영지는 몇 시간 전, 자신의 엉망이었던 기분과 흥겨워 보이는 사장 사이 괴리감으로 입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영지를 보며 사장은 지난 일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웃으며 충고했다. 아직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던 영지는 사장의 충고를 따라 자신이 예민한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불편한 상황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게 여전히 석연치 않았지만, 한편으로 익숙했다. 


부사장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사장은 영지를 8개월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지는 그간의 고생에 보답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장이 말한 승진 이유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낸다는 건 영지 한 명이 여러 명이 해야 하는 일을 처리했다는 뜻이고 사장은 이 점이 꽤 마음에 든다는 의미였다. 


과거 영지는 몇 차례의 스타트업 경험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기업 성장 초반의 특수 상황 말이다. 왠지 사장은 이를 일반적인 상황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영지는 사장이 보낸 축하 화환을 보며 입맛이 썼다. 


영지의 복잡한 심경은 금방 현실로 드러났다. 사장이 다른 법인의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회사소개서, 제품소개서 같은 일반 문서 제작을 지시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고민이 필요한 영업전략 및 제안서를 작성하고 관련 이해관계자를 만나라 지시했다. 영지에겐 당장 매일 아침 택배 송장 번호를 챙기고 현금흐름표를 작성하는, 단순하지만 매일 챙겨야 하는 업무가 이미 한가득이었다. 


돈을 쓰지 않고 고급스럽게

사장은 론칭행사를 갓 마친 신제품 매출이 부진하다며 판매처를 늘리라고 재촉했다. 제품 출시 전부터 연락해 오던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 팝업스토어를 오픈하기로 했다. 팝업스토어를 열었던 이력으로 해당 백화점에 붙어있던 면세점에 추후 입점이 가능할 수도 있었고 백화점 인근에 있는 큰 기업 대상으로 매출을 올리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백화점 담당자가 우호적이라 백화점 VIP 고객 공간에 제품을 따로 전시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적자는 안된다는 사장과 브랜딩을 고급스럽게 해야 한다는 크리에이티브 총괄 대표 사이에서 영지는 바람 풍선처럼 휘둘렸다. 사장은 영지를 따로 불러 고급스러운 브랜딩을 하되 적자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파트타이머를 4명이나 뽑고 행사장에서 집도 꽤 멀었지만, 영지는 백화점 팝업 스토어로 매일 출근했다. 갓 승진한 부사장으로서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넘어졌는데 열이나 

돈을 쓰지 않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위해 제품 향을 추출해 방향제를 만들었다. 향 제조 업체에 원료를 주문하고 블로그를 검색해 에탄올 그리고 오일 등을 일정 비율로 섞었다. 영지의 수고와 시간 덕분에 비용이 별로 들지 않았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지만, 향기를 맡고 매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출에 대한 부담도 크고 매일 현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하지만 행인에게 기세 좋게 핸드크림을 들이대고 너스레를 떠는 영지 내면의 또 다른 인격체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2주가 흘러 백화점 팝업스토어 마지막 날이었다. 영지는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 팝업스토어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를 보며 심장이 덜컹했다. 오래 살지 않았지만, 낯선 전화는 늘 불편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백화점 VIP실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고객이 영지 매장 앞에서 넘어졌고 열이 난다며 매장 책임자와 연락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마시던 커피가 위에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넘어졌는데 열이 난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지의 이해 여부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매장으로 복귀한 영지는 백화점 팝업 매장, 고객, 그리고 시설물 담당자와 순차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백화점 담당자는  영지 매장 바로 앞에서 고객이 넘어졌던 점, 그리고 방향제를 수시로 뿌렸던 점을 언급하여 백화점 측의 보험회사에서 영지 회사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전했다.  백화점 담당자와 직원만 출입 가능하다는 표지판이 달린 문을 지나 모니터 수십 개가 달린 방으로 들어갔다. 

출처 : Midjourney by 영지

매장 앞을 녹화한 CCTV를 확인하고 영지는 고객이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백화점 담당자는 VIP 회원이 현재 병원에서 매장 책임자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영지는 백화점 담당자가 전한 VIP 고객 번호를 하나씩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여보세요 고객님. (to be continued)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박지영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 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조직형 인간의 기묘한 조직생활 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