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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Jul 11. 2021

나를 견디는 법

나를 닮은 보리수나무


오늘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어제 저녁 남편 밥을 차려주고 보리수를 따러 나갔다. 계속 벨까 말까 고민하는 나무인데 올해도 보리수가 잔뜩 달렸다. 물론 부다가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보리수나무는 아니다. 수형이 예쁘지 않은 데다 새 가지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계속 내는 수종이라 나뭇가지 정리를 해야 하는 것도 힘들고 쓰레기도 너무 많이 나온다. 이참에 베어내고 예쁘고 향이 좋은 꽃을 피우는 위실나무를 심을까 했었다. 그런데 하필 올해 보리수가 어찌나 굵고 맛난 지 한 해 더 살아남을 것 같다. 내가 앓고 있는 천식에도 좋다는데 나무가 미워서 항상 나누어 주기만 했다.

보리수를 따는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열매만 땄는데 이리저리 휘어진 가지가 자꾸 걸리적거렸다. 빼곡히 달린 열매만 따는 것이 불편해 결국은 가지채 잘라 냈다. 가지에 붙은 열매만 골라내는 편이 훨씬 쉬웠다. 무아지경으로 가지를 자르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은 ‘그러다 나무 다 자르겠다’며 한 마디 했다.

나뭇잎과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를 걸러냈다. 쉽게 물러 터지는 열매라 살살 씻어 지퍼백에 나누어 넣었다. 얼려두었다가 먹으면 셔벗처럼 맛있다고 한다. 올해는 제때 따서 양이 많으니 나도 먹어 봐야지 생각했다.

보리수 열매를 다 따고  꽃까지 심고 나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해서 버리고 부엌도 대강 정리하고 열두 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다.

어제 일기 예보대로 아침에 비는 내리고 몸은 무겁고 일곱 시가 다 되어 침대를 빠져나왔다. 보통은 다섯 시, 늦어도 여섯 시에는 일어나는데 오늘처럼 늦잠을 자면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다. 여지없이 두통이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늦게 앱을 켜고 명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오늘 명상의 주제는 ‘자기자비’ 였다. 여기서 ‘자기자비’란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십여 분간의 짧은 명상 후 아침일기를 썼다. 오늘은 나의 하루를 적어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안약을 넣고 천식약을 흡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머리를 맑게 유지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아침일기를 쓴 후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먹는다.

맵거나 짠 음식을 먹으면 몸이 퉁퉁 붓는다. 배가 너무 고파지기 전에 소화가 잘 되는 빵이나 시리얼을 넣은 요거트를 먹는다. 점심도 저녁도 시간에 맞춰 먹는 것보다는 가벼운 음식을 수시로 먹어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몸과 기분 상태에 도움이 된다.

외출할 일이 없어도 머리는 꼭 감아야 한다. 24시간에 한 번씩 머리를 감지 않으면 두피가 너무 가렵다.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으면 허리가 아프니 샤워를 함께 한다. 옷을 고를 때도 면 이외의 옷감은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까슬거리면 가렵다.

청소를 미루면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나고 청소를 하면 날리는 먼지에 또 재채기가 난다. 2층은 로봇청소기로, 1층은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한다. 가구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을 때는 마스크를 하는 편이 안전하다. 공기 순환을 위해 창문을 여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원 일도 두 시간 정도가 적당하지만 몸 상태에 따라 한 시간 정도는 더 해도 괜찮다. 찬 공기를 갑자기 마시거나 몸이 피곤한 날은 비염 증상이 나타난다. 눈 점막이 부풀어 오르고 쉴 새 없이 재채기를 한다. 피곤할 때는 쉬지만 낮잠은 안된다. 낮잠을 자면 두세 시간을 자게 된다. 그전에 일어나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푹 자고 나면 마음이 허탈해진다. 쉬려고 소파에 누워 있다 보면 약기운에 잠이 들어버리니 한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점심에 먹는 약은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한 시간 이상 늦어지면 오후 내내 불안감에 시달린다. 불안감에 손, 발과 얼굴, 심하면 숨을 제대로 못 쉬고 혀와 등까지 저리고 아프다. 잊고 약을 먹지 않았다가 저녁 내내 정원을 계속 돌았던 적도 있었다. 집 밖에서 계속 움직이면 도움이 된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웃집에 놀러 간 날은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일찍 돌아와야 한다. 아니면 이웃집에서 눕게 된다. 다들 이해는 해주지만 내가 생각해도 볼썽사납다. 두 시간 수다 후엔 한 시간 휴식이 꼭 필요하다.

족저근막염도 있고 발 뒤꿈치 뼈도 내려앉는 중이다. 뒤꿈치 뼈는 점점 더 나빠질 뿐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집 안에서는 바닥이 두껍고 아치를 눌러 주는 모양의 슬리퍼를 신는다. 외출할 때에도 예쁘고 굽 높은 신발은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삼십 분 이상의 산책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 시간 후에는 잘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저녁에 수업이 있는 날은 설거지를 아침으로 미룬다. 저녁 명상도 간단하게 침대에서 한다. 쉬는 날은 저녁에 정원 일을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린다.

땀이 조금이라도 난 상태에서 샤워를 하지 않고 잠이 들면 밤새 긁느라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 머리카락 끝이 등에 닿으면 그 부분이 가려워 결국 등에 피딱지가 앉는다. 비누는 피부를 더 건조하게 하니 저녁엔 따뜻한 물로 땀을 씻어낸다.

잘 준비가 끝난 후에는 책이나 휴대폰은 보지 않는다. 자기 전에 핸드폰으로 영상을 본 다음 날 아침에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눈물이 다 말라 버리는 건지 눈꺼풀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꼭 각막에 눈꺼풀이 붙은 느낌이다. 삼 년 전에 육 개월간 안구건조증 치료를 받았지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너무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베개 옆에 두고 잔다. 읽을 수는 없으나 위로가 된다. 남편이 안방에 자러 들어오기 전에 잠들어야 한다. 깨어 있으면 남편이 침대에서 보는 유튜브 영상의 번쩍임과 소음을 피할 수가 없다.




쓰고 보니 일상의 제약이 많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일이 완벽하게 유지되지 않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내게 ‘자기자비’는 나 자신에게 연민을 갖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한심한 내게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인 모양이다.

명상을 끝내고 눈을 드니 보리수나무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높이를 확 낮추어 작게 키우고 싶어도 열매가 달리면 한없이 쳐지는 모양새 때문에 함부로 자를 수 없다. 게다가 이리저리 방향도 없이 자라는 가지 모양을 항상 주시해야 하는 것이 딱 내 모습이다. 오늘의 명상으로 스스로에게 연민을 갖기로 했으니 보리수나무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모양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나의 예민한 몸과 보리수 수형이 불쌍해 보일까. 여전히 둘에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기회에 보리수나무를 베어버리고 예쁜 꽃이 피는 위실나무를 심으면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무를 벤다고 내가 바뀔 수 있다면 벌써 베었겠지. 보리수나무 가지치기를 하며 스스로를 다듬는 중이었나 보다. 명상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나도 보리수나무 수형도 차츰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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