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그림 Dec 30. 2022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츠(2018)

어느 가족, 불행을 나누어 인

어느 가족이 있다. 이들은 서로 혈연 관계도 아니고, 어쩌다 같은 집에 모여들어 한솥밥을 먹는 사이다. 여기에 동네 이웃집의 환대받지 못하는 한 여자 아이까지 들어와 같이 지내게 되며 이 가족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


이들은 사회에서 속해서 일을 하지만 편법과 사기를 일삼는다. 일용직 노동을 하는 남자, 세탁소에서 일하는 여자 등은 남자아이가 훔쳐온 물건들에 의존해 생활을 한다. 세탁소에서는 딸려 온 물건들을 몰래 훔치기도 한다. 이웃 집 아이가 환대받지 못할지언정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데리고 있기도 하다. 성을 팔아 돈을 버는 아가씨도 있다. 또 할머니는 도박을 하고, 아이들은 방치된 상태로 돌아다니며 계획적으로 도둑질을 한다.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한 가족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티비에서 한 건물을 여덟 세대가 공유하고 공유공간을 같이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들도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고자 모인 케이스였다. 사회적 약자들끼리 서로의 상황에 공감하며 유일하게 서로 정을 나누고 기댈 수 있는 공동체로 영화 속 가족은 묘사되고 있었다. ​


실제로는 이렇게 소득이 적은 사회적 약자계층의 연대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괴짜사회학이라는 책에서 보면 오히려 이들의 모임은 불법이 가득한 범죄의 소굴이 되기도 한다. 영등포 쪽방촌의 경우도 흉기난동을 비롯한 범죄가 많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은 그 불법과 부도덕에도 불구하고 존재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록 정상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라도 살아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랄까. 현실에서 제도와 법으로 다 보호받지 못하고 혼자서 죽는 이웃들도 많은데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 가능한 판타지인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을 법도 해서 실례가 궁금해졌다.


실제로 소외된 이들이 모였을 때 어떤 모습일지 영화는 상상하게 한다. 이들은 다리미에 지져진 상처자국 등, 비슷한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사고인지 학대인지 모를 이런 상처들을, 구태연히 과거사를 들춰내지 않고도 몇 마디 말로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론 꼭 끌어안고 서로를 학대로부터 지키는 말들을 나눈다. 무겁지도 않고 일상적인 분위기로 영화는 이들 간에 가능한 치유와 상호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서로가 좋은 이유가 선택한 가족이기 때문에 유대감이 더 크고 서로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 좋다고 한다. ​


사회에서 이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들만의 집과 이웃집 아이와 몰래 함께 지내는 터전을 지킬 수 있다. 그 사실이 슬프다. 전국에 티비 뉴스가 아이를 찾는다는 광고를 하는데 이들은 여름 휴가까지 가니 말이다. 이들의 일상은 비정상성에 비해 평온해보이기까지 한다. 모래밭에 앉아 검버섯을 이야기하고, 홀로 ‘가족’에게 고마웠다고 인사를 건네보기도 한다. 이 집의 곧 돌아가시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


남은 가족들은 할머니의 돈을 타서 조금은 여유로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의 습관을 끊기는 어려운 것인지 이들은 물건을 훔치는 일을 계속하기로 한다. 할머니가 죽은 후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는데, 남은 가족 중 일부는 할머니가 남긴 돈을 즐거워하며 할머니를 경시하기도 한다. 사실 생각이 별로 없이 사는 것이다.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를 도둑질 혐의로부터 지키려고 소란을 일으킨 뒤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 잡힌다. 할머니의 돈을 즐거워하던 그 커플은 살인 공동정범이었다. 이들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하게 알려줄 누군가가 없었다. 그것이 이 ‘어느 가족’이 가족이 ‘비정상가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다. ​


이 가족의 범죄가 밝혀지고, 할머니와 한 여자 식구간의 묘한 관계가 밝혀진다. 할머니는 결국 돈을 위해 그 식구를 거둔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게 된다. 세상은 이 가족이 어떤 이유로 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결국 법과 질서 및 도덕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비정상이지만, 이들은 오히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왜 그러하냐는 질문을 남긴다. 비정상 가족을 보호하고 정상으로 되돌려놓을 건강한 힘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없다. 그렇기에 그렇게 잘 살기를 바랐던 영화 속 가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남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그들 일부의 감옥행으로 이 가족은 과연 해체되는 것일까? 영화의 말미에선 이런 궁금증이 남았다. 일단 사는 곳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달라졌다. 그러나 영화속 이들은 관계를 이어간다. 서로가 필요해서 모인 사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속에 우정이든 사랑이든 진짜거나 가짜인 것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이들에겐 생존 그 자체였을지도.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해체된 이들의 민낯이 너무나 날 것의 불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제주 여행 n번차의 11월 제주 여행, 엄마와 함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