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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우니 Oct 11. 2016

새롭게 살아보기, 느리게 걷기

'우리 동네'가 된 보수동 걸어보기




보증금은 0원, 하루 10만 원 언저리의 금액을 지불하고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내 집을 장만하게 됐다. 위치는 부산시 보수동으로 언덕길이 많고 조금은 노후된 동네였다. 시설 좋고 여행하는 데 있어서 더욱 편리한 집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한 어플이 소개하는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표어에 가장 알맞은 동네는 보수동이라 생각했다. 항상 여행지로만 생각했던 이 장소들이 잠깐이지만 '우리 동네'가 된다는 사실이 참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람 한점 없는 폭염이 지속됐던 부산의 날씨에 혹여나 내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감성적인 보수동의 모습이 현실에선 회사생활에 지쳐 오로지 집만 보고 걸어가는 애잔의 회사원과 같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새롭고 다양한 감정들을 얻고 또 버리기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 집만 보고 빠르게 걷는다는 건 너무 불행하지 않는가? 이러한 걱정 속에서도 불행한 현실을 맞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보수동, 우리 동네로 향했다.






3일이라는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이 시간들을 보수동에 투자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전망'이다. 꼬불꼬불 연결된 언덕길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보수산 아래 한적한 마을의 전망은 부산 앞바다는 물론 저 멀리 영도까지 내려다보였다. 이 멋지고 탁 트인 전경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순간 마음속의 외침이 시작됐다. '역시 나의 선택이 옳았구나!'라고. 몸이 조금 힘들고 불편하면 어떠하리, 탁 트인 전경을 그것도 집에서 볼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지게 됐으니 말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과 시선들로 가득했다.



우리 집 가는 길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은 부산에서의 하루는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저녁식사도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빈손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쉬워 양손 가득 주전부리를 들고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가 산복도로를 오르면 오를수록 밤하늘을 밝히는 빛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멋들어진 야경을 만들어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야경이 낮에 봤던 그 전망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상반된 매력과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버스에서 하차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야경과 함께했다. 여러 감정과 생각들을 뒤섞어주는 부산의 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의 일상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아쉬움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시간이 흘렀기에 부산의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고... 그리고 변화가 시작됐다. 부산에서의 새로운 삶 앞에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기로 말이다.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장의 사진으로 남기게 됐다. 별게 아닌게 별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를 알아보고 가기로 했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말이다. 하지만 느림 걸음으로 걷겠다는 다짐은 집 밖으로 나와 산복도로를 걷는 순간 깨져버렸다. 보수동이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 감성들이 나의 몸과 마음을 빼앗았다. '다짐'이라는 큰 과제가 필요 없이 자연스레 몸은 멈추고 마음은 느려졌다. 별게 아닌 게 별게 되는 순간이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우리 동네, 보수동 골목길이 주는 여운은 그 어느 여행지 보다도 깊고 짙었다. 버스로 빠르게 지나가는 과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골목길의 친숙함도 느리게 걸을 때만 누릴 수 있는 장점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정감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럴수록 사진 셔터 소리는 더욱 빨라졌고 내 발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참 재밌는 곳이다.



부산 여행의 '정점'을 찍었던 보수동 골목길
골목길의 친숙함은, 갇혀있던 나의 감성들을 파릇파릇 솟아나게 한다.
보수동 책방 골목 전경



수많은 계단길의 끝엔 또 하나의 '진국'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고 또 추억으로 새겨질 '보수동 책방골목'이 바로 그곳이다. 헌책으로 가득한 이 곳 골목길에 들어서니 내가 마치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월의 흐름을 배신하지 않는 헌 책장과 책들, 그곳에서 느껴지는 흘러간 시간과 주름들은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남기는듯했다. 



언젠가 본듯한 또는 언젠가 봤었던 만화 캐릭터들
그냥, 책을 쌓아 놓았을 뿐인데 내 손은 카메라로 향했다. 찰칵!
책장에 수많은 헌책들로 가득하다.
우리 동네 보수동은 정말 '짱'이었다.
여기도 보수동, 저기도 보수동, 바닥도 보수동
책방 골목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덕혜옹주
누군가의 추억 저장소
떠나는 길은 언제나 아쉬운 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책방 골목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by. 보수동 책방골목 내 우리글방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수동에서 살았지만 마음속에 박힌 친근함의 무게는 상당했다. 또다시 보수동에서 살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부산여행에서 '보수동'은 나에게 필수코스가 될듯싶다. 고향의 그리움이 이런 것일까? 분명 기간은 짧았지만 보수동에서의 보고 느꼈던 그 여운들은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기억되고 생각날듯하다. 또다시 부산을 찾을 때까지, 보수동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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