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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ma Han Mar 10. 2021

[프리랜서 다이어리] 1. 개선과 파괴

참치로 이제 회 정도는 썰 수 있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독립 후 맞이하게 되는 여러 감정의 곡선이 있는데, 그중 가장 당혹스러운 감정은 변화에 따른 공허함을 맞이할 때일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자각은 13년 간 꾸준히 실무자로 살았던 사람을 서늘하게 만드는 법.


혹자는 그 자유를 위해 프리랜서로 독립을 한다고 하지만, 말 그대로 아무 스케줄이 없는 하루가 통째로 - 갓 잡은 거대한 참치처럼 - 내 앞에 덩어리로 떨어졌을 때의 감정은 '이걸 구워 먹을까 날로 먹을까'보다 '이걸 칼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하지...아니 나한테 근데 칼이 있긴 한가...?' 에 가까울 것이다.

© itayala, 출처 Unsplash

이런 생각이 들면 그다음으로 찾아오는 생각은 이거다.


'이토록 긴 하루, 회사 다니면서 차차 준비하다가 나올걸 그랬나'

혹은

'이토록 긴 하루, 다른 곳에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정신 차리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내 경우에는 특히 에너지가 문제였다.

심지어 집 근처의 회사를 다니면서도 말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회사는 나의 에너지 뱀파이어였다.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이나 열정도 품게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곳을 벗어나서 덩어리 시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나마 신고 있던 얇고 불편했던 플랫슈즈(맞다. 월급의 비유이다)마저 벗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 선 느낌이 들었다.



작가 라이더 캐롤은 <불렛저널>이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변화는 개인적 그리고 직업적으로 생산성과 성장에 아주 중요하다. 변화는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또한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큰 변화는 공포라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생산적인 제스처나 행동이 오히려 동일하거나 더 큰 수준의 무기력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정점에 이르자, 오히려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

역설적인 이 문장이 프리랜서의 처지를 가장 신랄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는 '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개선'은 작은 질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커리어나 지위를 한순간에 저버리지 말고 무엇이든 점진적으로 진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선'의 반대에 있는 개념으로 '파괴(disruption)'의 리스크에 대해 이야기한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변화를 대하는 두 가지 입장, 개선 vs 파괴에 대해서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커리어를 '파괴'해 본 입장에서 감히 이야기해 보자면, 본인의 에너지를 잘 살펴보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에너지의 양이 다르기에, 퇴근 후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개선'을 취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회사를 당장 나오고 싶은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의외로 퇴근 후에 내가 에너지가 남아있는 상태라면? 일단 머물면서 하나씩 개선해 가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개선'을 취했다면 이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1년 사이에 많이 컸다...)


차일피일, 평일엔 주말로 개선의 기회를 미루다가 주말이 되면 다음 주로 개선을 미루다 또 1년이 갔겠지.

그만큼 나에게는 에너지가 부족했다.


맞다. 결국 케바케 case by case인 것이다.






개선과 파괴.


사실 이미 독립을 해서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프리랜서에게는 성과에 대한 측정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회사에 다니며 내가 괜찮은 성과를 냈을 때 '이게 혹시 운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프리랜서는 어떤 일을 잘해서 괜찮은 성과를 냈을 때는 '이번엔 운이 좋아서 00 씨에게 소개받아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네'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프리랜서 초년생들은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물음표에 빠져서 지내게 된다.

이게 내 능력인지, 우연인지, 운인지, 하염없이 되묻는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기에 지금이 개선의 때인지 파괴의 때인지 감이 잘 오질 않는 것이다. (개선이고 나발이고 운인가..?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직감. 그리고 나와의 대화.



작년 여름, 일이 잔뜩 몰려왔을 때의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교정 교열 일을 하고, 교안을 디자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회사 다닐 때와 비슷하게 바쁘고 비슷하게 돈을 버는 그 상황에 묘하게 안도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렇게 일감이 몰려왔다가 사라진 후, 다시 비슷한 일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 건 '개선'이었다.

디자인을 조금 더 다양하게 해 볼까. 마케팅을 다각화해 볼까. 홈페이지를 얼른 만들까. 등등.



하지만 그때 내게 필요했던 건 '파괴'였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어서 회사를 그만둔 것 아니었는가.

회사 다닐 때 비슷하거나 그 아래의 돈을 벌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마이너스로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걸 어렵사리 깨닫고 나서 나는 디자인과 전자책 교정 교열 비용을 대폭 올렸다.

사실 교정 교열의 경우 단순히 오류를 잡는 것 이상의, 컨설팅 서비스를 해 주고 있던 참이었다.


교정과 교열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부족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이 책을 강의로 만들었을 때 어떤 flow로 구성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컨설팅 위주의 서비스로 다시 포지셔닝했다.



작업 문의는 이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그 치열하고 쓸데없이 바빴던 여름을 지내고 나니 하루의 시간이 이제 더 이상 덩어리 참치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10분 단위로 쪼개서 생산성을 챙기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정말 하고 싶었던 교육 프로그램을 짜며 진정한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 courtneymcook, 출처 Unsplash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로 불려 온 파괴적 혁신(disruption innovation)을 주창한 경영학 구루이다.


그는 진정한 혁신과 성장 동력은 '파괴'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개선인가 파괴인가.

나의 에너지와 방향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나에게 가장 맞는 방법을 유연하게 취하는 것.

쉽지 않은 선택을 매 순간 해야 하는 커리어의 여정 위에 있는 모두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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