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의 세상에서 가장 긴 미술관
"건축물에 닿기 전에 빛은 자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빛이 있으므로 대상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대상으로 인해 빛은 진짜 빛이 된다." - 루이스 칸
스톡홀름의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긴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150명 이상의 예술가가 참여하여 고유한 테마와 스타일의 벽화, 조각, 설치 미술, 모자이크,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누구에게나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은 모든 시민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디자인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각 지하철 역사마다 벽화에는 그 사회가 지향하는 바 메시지가 담겨있었는데 노동에 대한 경외심,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 역사의식, 다양성에 대한 고려, 평화에의 추구 등 다양한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스톡홀름의 ‘1 % 법칙(Percent-for-Art)’에 기인하는데, 새 건축, 재개발, 증축 사업비 예산의 1% 이상을 공공 예술(조각, 설치, 벽화 등)에 할당하는 제도로 스톡홀름시의 지하철 역사(90개 이상)뿐만 아니라 병원, 광장, 공공건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자연 암석 노출과 조명
이들 지하철 역의 전반적인 특징은 자연 암석을 그대로 노출한 동굴형 공간으로 자연을 모티브로 한 벽화,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조명계획으로 자연과 인간, 기술의 조화를 모토로 하는 북유럽 디자인 정신을 보여준다. 자연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지하공간의 빛은 온전히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자연광이 완벽히 차단된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은 선택이 아닌 창조의 문제였다. 빛은 그 자체로 공간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언어였다.
스톡홀름 지하철의 조명 계획은 시대별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1950-60년대에는 균일한 밝기를 제공하는 형광등과 백열등 위주의 조명기구가 사용되었고 1957년 티-센트랄렌 (T-Centralen) 역에서 최초로 예술작품이 도입되면서 조명의 역할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었다.
70년대 이후 솔나 센트룸 역에 암석을 그대로 노출한 동굴형 역사가 등장하였고 조명이 암석 벽면의 질감과 예술작품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를 위해 간접조명 방식과 컬러 조명, 스포트라이트 등이 도입되어 예술 작품의 색채와 분위기를 살리는데 활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LED 조명이 도입되어 공간은 더욱 쾌적하게 만들었다. 쿤스트레드고르덴 역은 고대 정원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식물을 위한 빛 계획으로 작품의 디테일을 부각하고 역의 주제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1970년대에 완성된 파란색 계열의 넝쿨과 식물 문양, 그리고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지하철 건설과 운영에 헌신한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상징한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이 된 역이다. 지하철이라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 그려진 시원한 넝쿨의 문양은 보는 사람의 시각을 압도할 만큼 강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이미지를 비추는 빛의 광원이 모두 숨겨져 있어 오로지 그림자로 벽면과 천장의 질감이 드러나 보는 이의 눈이 편안하면서도 경이로웠다.
프루엥옌 역의 벽화는 콘크리트면에 직선적이고 얇은 선묘로 인물과 텍스트를 새긴 형식이다. 정돈되지 않은 드로잉은 저항, 자율을 상징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순순함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누구나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이 작품에 참여한 카린 프로스텐손은 스웨덴 여성운동의 상징적 인물들과 평화주의 인권운동가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녀는 일상의 공간에서도 저항의 인식이 가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73년에 완공된 이 작품은 에노 할렉과 오케 팔라르프의 작업으로 무지개는 희망과 다양성, 연대를 상징한다. 하늘을 담은 암반의 표현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둠 속에서도 빛과 연결되는 느낌, 심리적 개방감이 찾아왔다.
시청역 바로 아래의 지하역으로 천장 중앙에 달린 육각형 유리 등불은 시청 고아장의 램프 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원형으로 깎아낸 대형 기둥 주변으로 바위가 노출되어 있고 표면에 물결무늬와 색조의 변화는 이곳이 도시의 중심이자 공공성을 지닌 장소임을 상징한다.
자연 암반의 질감을 살리고 연한 분홍과 회녹색, 회백색의 색으로 마감하였는데 이는 지구의 대기층과 지각을 상징하고 인간의 지식이 자연의 구조와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은유하였다. 조명은 간접조명을 활용하여 암반을 질감과 색감을 더욱 부드럽게 표현하여 보다 자연에 근접해 있음을 실감하고 그 안에서 정서적으로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솔나 센트로무역의 붉은색은 자연의 파괴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고 녹색은 산업화 이전의 자연과 공동체를 상징한다.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상실된 공동체에 대한 회복을 주체로 하였다. 어둡고 거친 암벽(대상)은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동굴의 일부였지만,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붉은 조명(빛)과 만나 비로소 강력한 메시지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느 역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예술은 소수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한 스톡홀름 지하철 프로젝트는 지하 공간을 갤러리로 만들어 공공성과 문화의 민주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한 편으로는 이 방대한 예술작품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위한 인력과 예산 부족해 유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지는 가치를 시민의 일상과 공유하려는 시도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하라는 폐쇄된 공간에 자연의 요소와 인간의 공존을 강조하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된 빛은 예술 작품과 함께 시민들의 일상을 빛나게 하였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긍정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어떤 공간이든 그 공간을 완성하는 건 마지막에 등장하는 빛이다. 특별히 자연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지하공간에서, 잘 계획된 빛은 단순히 거쳐가는 단조로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 의미와 기억의 흔적을 만들어 낸다. 루이스 칸은 말했다. 빛이 대상을 완성한다고. 단 1%의 노력이 만든 커다란 변화가 시민들의 삶을 반짝이게 하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