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건축은 자연의 연장이다" - 알바 알토
건조하고 뜨거웠던 밀란의 여름을 뒤로하고 도착한 헬싱키에는 마치 초봄인 듯 시원한 바람이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 도시인 헬싱키는 무려 315개의 섬과 반도들이 혼재해 있다. 바다에 가까우면서도 숲이 중심부에서 북쪽 끝까지 길게 뻗어 있고 지형이 평탄하여 바다로부터 육지로 불어 가는 해륙풍이 별다른 지형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숲의 신선한 공기를 도심까지 공급한다. 이 바람은 쉼 없이 구름을 몰고 다녔는데 작은 구름들이 이곳저곳을 몰려다니며 비를 뿌리고 구름이 떠난 자리에 어김없이 태양빛이 내리쬐었다.
헬싱키의 빛환경의 가장 큰 특징은 계절에 따른 일조량의 차이로 인한 겨울에는 하루에 5-6 시간밖에 안 되는 일조시간과 여름에는 거의 19시간 계속되는 백야현상 때문에 극심한 빛의 부족과 과잉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광의 유입과 차단을 조율하고 보다 건강한 인공적인 빛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아래의 사진은 헬싱키의 건축사무소 JKMM 아키텍츠(JKMM Architects)가 설계한 아모스 렉스(Amos Rex)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왼쪽 사진은 전시를 관람하기 전,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전시를 마치고 나와 찍은 모습. 전시 관람을 하고 나온 사이, 구름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한눈에 보였다. 바람의 흐름대로 작은 구름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 틈새로 태양이 비추고 태양의 빛을 받은 빗물들은 작은 렌즈처럼 반짝거렸다. 빠른 구름의 이동이 만들어 내는 태양광과의 숨바꼭질은 천공광과 직사광, 반사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역동적인 빛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참고 : 비가 지나간 자리, 하늘에 남아있는 투명한 물방울들에 햇빛이 다시 비추면 물방울 속으로 스며든 햇살은 한 번 굴절되고 다시 반사되며 또 한 번 굴절되어 흩어진다. 그 과정 속에서 빛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일곱 개의 색으로 분해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개라고 부른다. 무지개는 단순한 빛이 아니라 햇살과 물방울,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순간적인 빛의 변주이다.
지하공간의 빛 조율
2018년에 개관한 아모스 렉스(Amos Rex) 미술관은 역사적 건물인 라시팔라치(Lasipalatsi)와 그 광장을 재구성하여 현대적 요소와의 조화를 이루었다. 광장에 들어서면 물결 모양의 돔 구조물이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이 유기적 형태의 채광 돔(skylight domes)을 통해 자연광이 미술관 내부로 유입된다. 콘크리트 타일로 마감된 돔 구조물 위를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돔 창을 통해 미술관의 내부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구조물을 바라만 보고 서 있을 때와 그 위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때 보이는 광경은 달랐다. 아주 작은 높이의 변화이지만 빛과 대응하면서 걸음을 옮기는 순간순간의 그 공간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술관의 입구는 1층에 있는 인포메이션 카운터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보인다. 발걸음을 옮기면 외부에서 보았던 돔 형태의 구조물이 내부의 천창이었음을 알게 된다. 채광창은 투명 유리가 아닌 산광 유리(diffused glass)를 사용하여 태양광의 강한 빛을 부드럽게 확산시켜 내부로 유입하였다. 반대로 밖에서 보면 하늘의 구름이 창에 반사되어 그려져 마치 하늘이 창 안에 담겨있는 듯 느껴졌다. 이 흥미로운 구조물은 빛을 모으고 퍼뜨리면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였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그들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돔을 통해 유입된 빛이 둥근 천창 주변의 종이 구조물을 통해 공간에 퍼져나간다. 빛이 닿는 위치에 따라 질감을 달리하면서 다채로운 실루엣을 연출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외부의 바람과 빛 변화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며 지하공간의 빛의 흐름을 주도한다. 이는 정적인 인공조명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살아있는 빛환경의 구현이다.
암벽을 깎아 만든 교회
헬싱키의 토요일로(Töölö) 지역에 위치한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교회는 거대한 화강암 암석을 깎아 교회의 내부를 만든 건축물이다. 교회의 외부는 거대한 암석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어 언덕을 타고 올라가면 교회의 천장이 되는 중앙의 돔천장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회 내부로 들어오면 중심의 지름 24m의 구리로 만든 돔 천장이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 돔 천정은 산화되지 않은 구리로 마감되어 빛이 닿으면 붉은 계열의 빛을 더 많이 반사하는데 돔을 둘러싸고 있는 경사진 창들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의 음영의 변화를 만들어 내어 그 웅장함이 주는 공간감을 경험케 하였다. 또한 자연광이 주는 빛은 실내를 따뜻하고 온화하게 만들었다. 이는 특히 겨울철 부족한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요소였다.
불규칙한 빛의 리듬
돔 천장과 바위벽 사이로 수많은 유리창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돔을 둘러싸는 유리창은 그와 맞닿은 바위벽의 형태를 따라 불규칙하게 만들어져 자연스러운 빛의 반사를 이끌어내었고 내부에는 다채로운 빛을 구현하였다. 분명 실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인공조명이 완전히 배제된 자연스러움이었다. 유리창 사이로 금속 프레임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빛을 조절하는 동시에 공간의 형태를 강조했다. 이는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면서도 내부의 눈부심을 제어하는 장치가 되었다. 특별히 제단 위의 스카이 라이트는 다른 부분보다 크게 설계되어 하늘로부터의 빛이 강조되었는데 나는 그것이 제단을 더욱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곡선이 만드는 부드러운 빛
깜삐 예배당은 아모스 렉스 미술과 바로 옆에 있는 아주 작은 건축물로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인지 인식할 만한 특징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간결했다. 건축물의 높이는 약 11미터의 타원형으로 매트한 핀란드산 스프러스 목재를 사용하였다. 방문한 날 마침 비가 왔는데, 타원형 외관이 만드는 곡선이 마치 처마처럼 사람들이 비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의외의 기능을 보여주었다.
건물의 내부 역시 천정과 벽이 맞닿은 천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막혀있어 곡선의 벽면이 만들어 내는 포용적이고 아늑한 공간감을 극대화하였다. 교회의 곡면 구조는 목조를 적층 하여 뼈대로 만들었는데 이 구조는 곡률이 큰 대형공간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빛은 오직 천창을 통해서 내부로 벽을 타고 내려왔는데 태양광이 직접 들어오지 않고 곡면을 따라 확산되도록 설계되어 충분한 광량을 받아들이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고 부드럽고 평온한 빛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천정과 벽의 틈으로 세어 들어오는 빛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었고 빛에 의해 강조된 부드럽고 안온한 느낌의 벽면은 교회가 갖는 상징성인 환대의 의미를 극대화하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 공간에 편안히 머물렀고 바닥에 있는 쿠션에 기대어 한참 동안 쉼을 얻기도 하였다.
헬싱키 사람들은 빛의 과잉과 부족이 극심한 자연환경 속에서 지혜롭게 그들의 삶의 환경을 발전시켜 왔다. 넘치는 자연광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건축적인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한편으로는 빛이 부족한 시간들을 위해 따뜻한 색감의 조명, 간접조명, 디자인 조명의 연구, 개발에 힘써왔다. 빛은 그들에게 커다란 유익과 고통을 주는 요소였고 가장 밀접하고 직접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고 공존하는 디자인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장애가 되는 자연의 특성조차도 고유한 디자인 언어로 승화시켜 나갔다. 이는 알바 알토가 말했듯, 건축을 단순히 인공적인 구조물이 아닌 '자연의 연장'으로 여기는 핀란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건축은 자연의 연장이며 빛은 그 중심에 있다. 나는 그것을 헬싱키에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