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한 번은 써야 할 엄마 이야기 -
우리 엄마는 재래시장에 가는 걸 싫어한다. 자칫 값을 물어보았다가는 상인 할머니들한테 꼼짝없이 붙잡혀 물건을 강매당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사람이라 내가 보기엔 얼마 안 하는 물건이라도 어쩔 수 없이 사게 될까 봐 걱정한다.
“엄마, 이거 어때? 들어가서 얼마인지 물어볼까?”
“아니야. 좀 더 가보자.”
“왜? 안 궁금해?”
“응... 한번 들어가면 안 사고 나오기 힘들어.”
“그럼 계속 이렇게 밖에서 보기만 해?”
“뭐 살라고? 이렇게 생긴 것도 있고, 저렇게 생긴 것도 있는디 볼 텨?”
제아무리 상인 할머니를 피해 보려고 용써도, 이렇게 훅 들어오는 할머니를 만나면 끝이다. 우리는 보통 그 할머니의 물건 중에서 하나를 사서 집에 들어온다. 사 온 물건을 쳐다보는 엄마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아무래도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상인 할머니들을 무서워하는 엄마의 모습이 재밌어서 전통시장 온누리 상품권이 생겼을 때 가끔 시장에 가자고 엄마를 꼬신다. 뻥튀기 가게에도 들러서 집에 있는 쌀이나 콩으로 튀밥도 만들어 오자고 몇 마디 보태면, 엄마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순순히 넘어온다.
어느 날은 동네 할머니가 우리 엄마를 보더니 “오십이 넘어서도 그렇게 착하게 생기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싫은 소리를 했다가는 그 생각이 계속 나서 본인이 밤에 잠을 못 자기 때문에 절대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도 서러워서 잠을 못 잔다.
큰 딸인 나한테 와서 밖에서 서운했던 일들을 곧잘 성토한다. 나는 너무하다 싶은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꼭 하고 다니는 성격이라 엄마 얘기를 듣고 나면 무척 열불이 난다. 말해줘도 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음에 그 아줌마가 또 그러면 이렇게 얘기해줘.”라든가, “아니다. 다음에 그 아줌마 만날 때 내가 따라 나가면 안되나?”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만다.
가령 나는 회사에서 부장님이 “이 서류는 왜 아직도 그대로 있어? 처리를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하고 사람들 많은 데서 면박을 줄 때는 “죄송한데 진짜로 어려워서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대답하며 “그럼 출장은 언제쯤 같이 가는 걸로 할까요?”하면서 냉큼 약속을 잡아버린다던지,
신입사원들이 줄줄이 퇴사해서 업무분장을 다시 해야 했을 때, 차장님이 혼자 일을 다 떠안으려고 해서 내가 반절 나눠서 하겠다고 말했다가 동료 직원이 “지금 일이 할 만 한가 보네? 그럼 내 것도 좀 해주지?”라고 얄밉게 굴길래, “제가 왜요? 과장님 일은 하기 싫어요.”라고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말해버리는 식이다.
그런 나를 두고 엄마는 “너는 나를 하나도 안 닮고, 앙앙거리는 게 꼭 아빠를 닮았어.”라고 한마디 하곤 한다. 얼마 전에 기어코 ‘복합적인 내 성격을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하지 말아 달라! 아빠와 나는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살아왔으므로 절대로 같을 리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물론 엄마는 별생각 없이 매번 쓰는 표현이었겠지만, 난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았다.
가뜩이나 요즘 갱년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데,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나는 참는 게 미덕이 아니고, 잘못된 것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더. 엄마는 불편함을 잘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내 의견은 자주 일방적이게 되고, 나는 엄마의 마음을 말없이 눈치채야만 한다.
엄마는 본인과 내가 달라서 때로는 버거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좋아하기도 한다는 걸 안다. 난 엄마가 좋은 어른이란 걸 알고 있다. 내 얘기를 제대로 안 듣는 척하지만, 사실은 잘 듣고 있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일단은 잠자코 들어주었던 엄마 덕분이다.
오래전에 사주팔자를 봤을 때, 엄마와 합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엄마랑 같이 살아서 성격이 둥글어지고 있으니, 엄마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살면 잘 산다고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애쓰지 말고, 생각도 너무 많이 하지 말아.”, “운동 열심히 해.”라는 말 외에는 요구사항이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신나서 이야기할 때 잘 들어줄 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엄마와 나는 아쉽게도 서로 무지 다른 사람이지만 앞으로도 서로를 존중하면서 지금처럼 재밌게 살았으면 한다는 것.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다니는 모습조차 내 눈엔 사랑스러운 엄마는 “나의 오랜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