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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san Aug 31. 2022

Dachau 여행기 II

나치 강제 수용소

드디어 나치 강제 수용소에 도착. 12시 독일어 가이드 안내를 위해 표를 끊고 기다렸다. 수용소 입장은 무료이고 해설 가이드는 4유로, 오디오 해설기를 대여할 수도 있다. 우리의 해설사인 크리스티나를 따라 서른 명 정도의 관람객들은 수용소에 들어섰다.

닥하우 수용소 정문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정문에 쓰인 글 귀처럼 1933년 처음 수용소가 생겼을 무렵에는, 주로 정치범인 수용자들이 1개월, 6개월 등등 각각 정해진 수감기간을 마치면 풀려났고, 수감기간 중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면 석방되는 경우도 있었다다. 특히 첫 수감자들이 수용소에 도착했던 사진을 보면, 수감자들은 겁에 질려 움츠린 모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과 어리둥절함의 표정과 동작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감독자들도 특별히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그저  교통경찰처럼 보인다. 당시 지역신문에 이곳에 히틀러 나치 정당에 반대하며 국가에 해를 끼치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파들을 수감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수감자들이 입소를 위해 행정동 건물에 들어서면, 이름, 나이, 고향, 직업, 수감 이유 등을 기록하는 절차를 마치고 개인 물건 일체를 압수당한 뒤, 알 몸으로 신체검사와 목욕을 거쳐 수감된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간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감되었으며,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파 등 정치적 인사뿐 아니라 집시, 외국인,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포로, 체제에 반대하는 종교인 등 다양한 이유로 끌려왔다.

흥미로운 점은 나치 시절 이러한 강제수용소가 닥하우뿐만 아니라 전 독일, 더 나아가 폴란드 등 이웃 지역에까지 체계적으로 설치되고 관리되었다고 한다. 닥하우는 나치의 첫 수용소로 설치되었고, 그래서 이후 강제 수용소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수감자들의 국적도 다양했는데, 폴란드 출신은 4만여 명으로 독일인 수감자(3만여 명) 보다도 많았고, 프랑스, 러시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등 30여 개 국에 달했다. 

행정동 뒤의 감옥은 특별 수감자들이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격리되어 독방에 갇혀 있었다. 앉거나 눕지 못하고 48시간 서 있어야 하는 "선 감옥"도 있고, 잘못을 하면 다른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매질을 당하는 형틀과 형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제1기(1933-1937)     제2기 (1938-1943)

제3기 (1944-1945)

행정동 앞 양쪽으로 늘어선 30여 동의 막사는 수감자들의 생활장소인데, 가로 10미터, 세로 100미터로 총 1000제곱미터의 크기의 막사에 초기에는 250명의 수감자를 기준으로 했지만 1944년 무렵엔 2000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시기에 따른 침구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위의 사진처럼  3층으로 설계된 침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촘촘하고 좁게 변해갔다.

막사는 내부가 보전되어 있는 한 동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되었다. 아름드린 미루나무 사이사이로 막사들의 서 있던 자갈밭 고랑마다 막사의 번호가 남아 시간을 견디고 무겁게 누워있다.

왼쪽 마지막 줄의 30번 막사가 있었던 자리까지 텅 빈 그리고 적막한 공간을 걸으며, 제대로 생리현상을 해결할 화장실이 부족해 늘 긴 줄을 서야 했을 수감자들로 가득 찼을 날들을 상상해 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막사가 끝나는 곳에 철조망과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문이 있는데, 그곳을 나가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바로 수용소의 화장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두 개의 가마가 있는 화장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감자와 열악한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간 사망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섯 개의 가마를 설치한 화장장을 새로 설치했고, 그 안에 샤워실을 연상시키는 가스실도 마련했다. 해설자는 이 가스실은 대량학살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독일군이 특정한 수감자에게 여러 종류의 화학무기를 시험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산처럼 쌓였던 시체는 2구, 3구씩 함께 시체 한 구가 들어가기에도 좁아 보이는 가마 속에서 태워졌다. 그리고 화장된 재는 따로 인정될 겨를도 없이 근쳐에 유기되어서, 화장터 근방은 자연스레 공동묘지가 되었다.

끔찍한 현장을 보고 나와서, 관람객도 해설자도 그저 할 말을 잃고 촉촉해진 눈가를 훔친다. 크리스티나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무명의 수감자가 남긴 시를 잃어주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들였을 때,
 난 가만히 있었다.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을 잡아들일 때,
난 가만히 있었다.
난 사회민주당이 아니니까.
그들이 유태인을 잡아들일 때,
난 나서지 않았다.
난 유태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아들였을 때,
아무도 날 위해 저항하지 않았다.

기독교 회개교회 (Evangelische Versöhnungskirche)

용소의 막사의 끝자락에는 수감자들의 영혼을 기리고, 방문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려 각 종교의 기도소가 나란히 서 있다. 기독교는(Helmut Struffler) "모든 우파적인 테러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오른쪽의 질서를 배제한" 낮고 깊은 잿빛의 땅 아래로 몸을 숨긴 교회를 지었다.  

천주교 성당

둥근 자갈로 원기둥처럼 쌓아 올린 성전의 뒤 편에는 가시관을 쓰고 고뇌하는 예수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소용소 뒷 담과 이어진 곳에 가르멜 수녀원이 자리하고 있다.

유대교 기도소

천주교 성전의 옆으로 유대교의 기도소는 무덤으로 향하듯 낮은 입구를 들어서면 좁고 높게 지어진 건물 안쪽에 하얀색 대리석 따라 빛이 들어온다. 천정에 뚫린 작은 구멍은 마치 천국을 향한 한 가닥 희망을 형상화한 듯 어둡고 차가운 벽과 대조를 이루었다. 유대교에 대해 문외한이라 건물의 구체적인 상징과 용도는 모르겠자만, 안토니오의 눈에는 수용소 안의 종교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게 비친 모양이다. 사실 화장터로 향한 길목에 러시아 정교의 작은 교회도 있었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의 역사.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곳곳에 전쟁이 벌어지고,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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