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소서

인간다운 죽음이란 무엇일까?

by 주영헌 시인


넷플릭스의 『은중과 상연』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 드라마는 40대가 된 두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친구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이들이 지내온 시간을 살피면, 이유가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였으나, 20대 30대를 지나면서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집니다. 여러 좋지 못한 상황이 겹치고 겹쳐, 상연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했고, 오랜 친구였던 은중과의 만남에서도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연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은 채 말기 암의 고통에 시달리던 상연은 은중에게 연락합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죠. 자신과 같이 (자신의 존엄사를 위해) 스위스로 가 줄 수 있냐고.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상연의 처지였다면, 누구에게 저 끔찍하게도 어려운 부탁할 수 있을까. 내 소망을 들어줄 친구나 가족이 있을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평가절하 할 수 있으나, 드라마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존엄사’의 옳고 그름을 얘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습니다. 물론 가장 존중받아야 하는 이들은 직접 고통 받는 환자이겠으나, 실제 이들의 의견은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일이 아닐 경우 관심이 덜하며, 이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저 일이 나의 일이 된다면 어떠할까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참아낼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내가 숨쉬고 있습니다. 어떤 약이나 수술로도 내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25년 3월 허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위태위태했던 디스크가 터진것입니다. 저는 고통을 잘 참는 편이라서, 이또한 잘 참아낼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스크가 터지고도 며칠을 참아냈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이 한계였습니다. 며칠만 더 참아낸다면, 아내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대학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었으나, 제 결정은 가장 빠른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의 입원 수속이었습니다. 그 고통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고통이 계속된다면, 내 삶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어쩌면 ‘산 자의 땅 위엔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하시고, 이 고통에서만 나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 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며칠이 전부였지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한다면, 나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최고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호스피스 환자를 인터뷰하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고통이 더 무섭다고 말합니다. 실제 호스피스 병동의 목적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을 줄이며, 인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될겁니다. 인권이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를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는 시기나 환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학생에게는 학생의 인권이, 직장인에게는 직장인의 인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기 암 환자에게 인권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권리’,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Well-dying’이라고 생각합니다. ‘Well-dying’ 인위적인 생명 연장이 아닌, 지인들과 가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마지막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닐까요.



구원하소서


주영헌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어디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며칠인지, 비가 내리는지, 눈이 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본 것을 믿고 싶지만,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 끊임없이 묻습니다. 말합니다. 말문이 막혀버린 내가, 수다쟁이가 되어, 나무에게 얘기합니다. 바람에게 얘기합니다. 벌레에게 얘기합니다. 내 옆을 지나쳐가는 모든 것에게 얘기합니다. 말을 겁니다. 대꾸하지 않아도 말을 겁니다. 응시할 수 있다는 것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대여, 나 여기 있습니다. 숨 쉬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내가,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하는 까닭은 세상이 당신을 중심으로 자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의 바닥이자 하늘입니다. 그대여, 희망을 잃어버린 내가, 희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가 당신을 희망합니다. 산 자의 땅 위엔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하시고, 이 고통에서만 나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


* 마지막 때의 구원은 무엇일까? 호스피스 병동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생자(生者)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구원은 인간의 존엄을 간직한 채 죽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닐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