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질주인줄 알았는데, 내 등 뒤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다가, 시쓰기에 좋은 몇몇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시에 적당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고, 핸드폰을 열어 문장을 옮겨적었습니다. 그다음 날, 적어놓은 문장을 살폈습니다. 핸드폰에 적을 때만 하더라도 시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렷한 정신으로 읽으니 제 기준에 한참 못 미쳤습니다.
그래도 시를 쓰기로 마음먹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다시 일어서기도 민망해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던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앞만 보고 걸었던 삶’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삶은 직진성이 강합니다. 교통신호로 따지면, 일방통행로에 가깝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직진성의 구호는 다양한 기관에서 채택되며 구성원에게 강요되기까지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구호로는 ‘안 되면 되게 하여라’ 또는 ‘하면 된다’와 같은 것일 겁니다.
직진성의 구호는 조직의 태동기에는 그 조직을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여러 부작용이 수반됩니다. 성공과 발전만을 목표로 하므로 '편법'이나 '탈법'도 합리화되며, 낙오자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인정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직진성의 구호가 가장 치열했던 순간은 1970 ~ 80년대로, 오늘 우리의 성공의 바탕은 과거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 진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과거의 가치가 우리의 유전자에 깊숙이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양립(兩立)’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양립은 ‘두 가지가 동시에 따로 성립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양립에는 보통 의미가 다른 두 술어가 연결되는데요, 그것은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 ’입니다.
양립엔 ‘가능’과 ‘불가능’ 중에서 어떤 술어가 더 적당할까요. 양립이 상반되는 두 가치가 맞선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가능보다는 불가능이 더 어울릴 수 있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물질이나 개념을 한자리에 완벽히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가능하다’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가치 실현을 꿈꾸기 위해선 다른 개념(반대되는 개념 포함)의 양립은 필수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일’과 ‘가정’의 양립일 것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기도 하고, 시에 담아내고 싶은 문장이기도 하고요. 시를 쓴다면, 저는 이렇게 적을 것입니다. ‘혼자만의 질주라고 생각했는데 / 등 뒤를 돌아봤을 때,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다’라고요.
내가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고 내 등 뒤에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앞만 바라보고 달려, 그 성공만으로 내 모든 행복을 갈음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 보통의 삶을 성공만으로 가득채울 수 없습니다. 삶 속에서의 행복은 사람과 사람, 관계 가운데서 출발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관계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내 가족과 내 주변을 살피는 것이 성공에 대한 추구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고 생각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나를 바꿔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 주변에도 내가 챙기고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나도 보살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상호성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줄 것입니다.
주영헌
삶에 직진만 있는 줄 알아서
그렇게만 배워서
쉼 없이
앞만 보며 뛰다가 달리다가 힘에 부칠 땐 잠시
걷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너무 힘에 부쳐
멈춰 섰을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도 내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삶이 혼자만의 질주라고 생각했는데
등 뒤를 돌아봤을 때, 거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
뛸 때는 뛰고
달릴 때는 달리고
걸을 때는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