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장례식장은 삶의 품평회

by 주영헌 시인


시인으로서 저는 죽음과 관련된 시를 자주 씁니다. 물론 빨리 죽고 싶다거나 죽음을 희망해서도 아닙니다. 누가 빨리 죽고 싶을까요. 그렇다고 영원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 세계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울과 고독이 전부일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장례식장에 갈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의금도 부담되고요, 지난주에도 지인 부모님의 장례식장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가 아들이자 손주, 사위이다 보니 상주를 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한 일이 되어갑니다.


모든 장례식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망자가 어떻게 돌아가셨냐 소곤소곤 묻는 것입니다. 사고로 돌아가셨으면, 무슨 사고인지, 병으로 돌아가셨으면, 무슨 병이었는지 살핍니다. 망자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추억일 수도 있겠고, 그다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니, 저는 장례식장이 ‘망자에 대한 품평회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얘기가 많이 들릴 것이고 나쁜 사람이라면 나쁜 얘기가 많이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요,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내 장례식장이라면 어떠할까. 나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나쁜 사람이었을까.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노력이 타자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내가 노력하는 만큼 타자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나도 모르게 큰 피해를 줬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를 줬는지 모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에 관대하듯, 자신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일 것입니다.


삶에 대한 평가는 언제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가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생을 마감한 이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늘 유동적이고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게 되지만, 죽음 이후의 평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뿐이지만, 그 하루들이 모여 언젠가 누군가의 입에서 “그는 이러한 사람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때, 내 진정한 평가 중의 하나로 갈음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주영헌



나도 언젠가 장례를 치르겠지


나의 장례식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와 줄까


우는 사람은 없을까

웃는 사람은 있을까


장례식은 내가 살아온 날들의 품평회일지 몰라


이러쿵저러쿵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얘기하겠지


영혼으로라도 며칠쯤

지구 위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의 얘기를 들어볼 거야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물어보고 싶다


착한 귀신처럼

무덤에서 일어날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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