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외할머니의 집에 다녀왔다.
나에게 외할머니*라는 존재는 중요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놓쳐서는 안 되는 시간을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할머니를 방문할 때마다, 전화를 할 때마다 할머니의 나이듦이 느껴졌다. 5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2년쯤 지난 후부터 할머니는 급격하게 늙어 갔다. 반려자와 함께 쥐고 있던 나이듦의 고삐를 풀어 버린 것처럼.
혼자 있는 할머니를 방문하는 일은 내게는 어느 정도는 숙제였다. 할머니가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하거나 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할머니는 세월의 파도에도 자신만의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 가는 사람이다. 매일 꽤나 오랜 시간을 들여서 하는 운동, 늦은 시간까지 달그락대는 그릇들, 잠자리에서 읽는 추리소설. 할머니는 자신만의 확고한 루틴을 갖고 있다. 그런 할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이 연민에 더 가까워진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거의 모든 일상을 공유하다시피 했다. 60년을 함께해 온 사람이 같이 살던 집에 더 이상 있지 않다는 사실, 그 사람의 흔적에 시시각각 부딪히며 부재의 적막을 혼자 견뎌내는 것을 상상했을 때, 나라면 버거울 것 같았다.
이번에 갔을 때, 할머니가 상자 속에 넣어 둔 오래 된 화장품을 모두 버렸다. 립스틱, 파운데이션, 남대문 시장에서 샀을 것 같은 일제 파우더도 있었다. 그 화장품들은 보통 1년에서 2년 정도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외출이며 운동이며 모든 것을 함께했던 할아버지가 떠나고, 종종 만나던 친한 친구들도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거동이 불편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머니는 더 이상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화장품의 유통기한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버리는 내게 "이건 둘까? 혹시 나가게 되면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새 화장품을 사다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나가게 되면'. 할머니가 화장품을 버리는 것이 자신이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할 가능성을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가장 새 것으로 보이는 샤넬 립스틱 하나를 버리지 않고 두었다. 할머니도, 혹시 나가게 되면 그 립스틱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스킨이나 로션 같은 기초화장품도 이제 예전처럼 제대로 갖춰 두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 각종 과일을 갈아 팩을 하고 오일마사지를 하던 예전의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가 이제 정말 늙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정말로 늙었다. 이번에 갔을 때는, 할머니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정도가 예전보다 심해져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자명한 사실을 왜곡해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좀처럼 참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이 들었어도, 엄마에겐 여전히 상처를 주고받았고 견디기 어려운 점을 가진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의 관계가 아니기에 할머니의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방문에서는, 감정적으로 지치게 되는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었다. 실은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두 사람의 옛 기억을 함께 들으려는 야심한 계획도 있었지만, 장렬하게 실패했다.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의 관계는, 내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이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이해하면 나와 엄마 사이의 이야기도 나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까? 엄마에 대한 모순적인 나의 감정을 생각하며,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의 모순을 생각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쓰려 하는 나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나이듦의 속도를 따라잡고 내가 무언가를 써낼 수 있을까? 내가 할머니에게 갖고 있는,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여서 가능한 애틋함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와 돌아가신 (친)할머니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만의 유별난 고집을 가졌던 시모를 엄마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친)할머니 사이의 어떤 유대감을 나는 늘 감지할 수 있었다. 많은 부분이 닮았을 아버지와 아들을 남편으로 둔 사람들 사이의 연민 섞인 허탈한 유대감이었을까. 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마음을 깊게 듣는 것도 아직 요원하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친)할머니 이야기도 좀 진지하게 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나는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의 엄마, 할머니, (친)할머니라는 원 안팎으로 내가 듣고 싶어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한다. 그 듣기의 변주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내가 만날 사람들은 그들과 직접 관련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실은 이 만남들이 무엇이 될지 명확하지는 않다. 나는 나의 주제에서 출발하고, 여장은 꾸렸으되 종착지는 아직 안개 속에 있다.
*필자는 외할머니를 '할머니'라고 호칭한 지 오래되었고, '외가'와 '친가' 가족들의 호칭이 비대칭적이라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외할머니를 '할머니'라 표기하고, 구분을 위해 '(친)할머니'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