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의 기억
작년 한 해 나는 어떤 해보다도 더 이상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세상이 점입가경으로 이상해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더 불편함을 많이 느끼게 된 것인지. 승리가 나보고 아홉수라고 힘내라고 했다. 그런 작년 여름 어느 날 분노에 차 써내려간 (취중) 일기의 일부분이다. 취중이라 너무 오그라드는 내용들을 삭제했다. 이 글의 직전에는 중년 남성 인테리어 업자에게 무시를 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여자화장실 벽에만 있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다음 이어지는, 여기 실은 글은 그 당시 나의 최대 화두였던 초경과 몸의 억압에 대한 이야기.
승리의 몽정에 대해 질문했다. 초경에 대한 껄쩍지근한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지금까지 승리의 2차 성징과 관련한 첫 경험에 대해 질문한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는 첫 몽정과 가짜 몽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승리의 어머니는 남자 아이가 몽정을 하면 선물을 준다고 아들들에게 말했다. 승리는 선물을 받고 싶어 몽정을 했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고, 새 팬티를 얻었다. 그리고 진짜 첫 몽정이 있었을 때에는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밤에 혼자 깨어서 팬티를 빨아서 빨래통에 넣고 새 팬티를 입었다고 했다. 야동을 접할 수도 없고 해소할 방도가 없을 때, 군대에 있을 때 같은 때는 몽정을 한다고 했다. 몽정을 하고 나서 삶에서 뭐가 달라졌느냐고 물으니, 여자 아이들이 그전까지는 그냥 친구였는데 이성 친구가 되는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만 말했다. 캐내어도 그 이상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초경을 하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경 이전과 이후의 삶은 너무나도 달라서 굳이 생각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우울했다. 삶이 이런 것이라면 어떻게 평생을 견뎌야 하나, 여자로 태어난 것은 치명적인 저주가 아닐까.
엄마는 초경을 하는 것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은 초경을 하는 것은 진짜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들 했다. 엄마는 화장실에서 내가 엄마를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가 팬티에 피가 묻었다고 했을 때, 생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고 축하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엄마와 남동생과 셋이 갔던 식당의 이름, 그날 내가 입었던 옷 들을 모두 기억하고 다시 떠올릴 수 있다. 검정색 달걀판을 덧대 놓은 그 식당의 독특했던 벽면 인테리어, 깡통에 매달아 놓은 조명도 기억할 수 있다. 우리 음식을 주문하던 그 순간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과는 너무나도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에게 벌어진 무언가, 숨기고 싶은 그 무언가를 축하하러 온 우리 가족을 위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주었다.
나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어렸을 때 싫다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초경을 한 날도 ‘그것을 기념해서’ 외식을 하러 나가는 것이 싫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이후에 그 음식점을 갈 때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수치스러운) 어떤 일에 대해 떠올려야 했다. 엄마는 아마도 아빠에게도 그것을 말했을 테고 나는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가족 안에서는 계속 무성적인 존재여야만 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 시기 나는 내 가슴이 계속 자라고 있고 자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는 그저 내가 자라고 있고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해 신이 났을 것이고, 그 신남은 철없음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 용서되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아빠는 나에게 브래지어를 선물해 주었다. 그때의 내 몸에는 조금 컸다. 그래서 엄마는 마트에서 나에게 맞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사 주었다.
아빠가 나에게 사 준 브래지어를, 싫은 내색 못 하던 나는 겉옷 위에 차고 친척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이 나에게 수치스러운 일일 거라고 아빠도, 심지어 엄마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아빠는 가족들의 일을 캠코더로 찍는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 이후 내가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다시 볼 때 그 장면이 나올까 봐 얼마나 끔찍히도 몹쓸 기분이 되었는지 우리 가족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월경이, 가슴이 자라는 일이 부끄럽고 감춰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린 나는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단번에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여자아이로 태어나고 자라난 나에게 그때까지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주입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예쁜 치마를 입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의 날들에 대해서만 기억한다.
나는 초경을 하게 되었을 때 축하의 의식과 몸의 찜찜함에 대한 불쾌감은 느꼈지만 어쩌면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에 조금 으쓱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구나. 나는 조금 더 컸구나. 하지만 같은 이유로 학교에서는 그것이 감추어야 할 일이 되었다. ‘생리하는 여자 아이들’에 대해 남자 아이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것이므로 누가 생리를 하는지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기 전 남자 아이들을 내보내고 나서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만 말했다. 생리를 하는 학생이 8명 즈음 되는 것으로 안다고. 생리대를 잘 챙겨 오고... 잘 처신하라는 말이었다. 화장실에서도 잘 접어 버리고.
6학년 때, 6학년 전체 여학생들이 성교육을 받았다. 그 전까지의 성교육은 모두 함께 받는 것이었으나, 6학년이 되고서는 갑자기 다른 분위기가 생겼다. 성교육에서는 생리와 성폭행과 임신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지만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그리고 그 시간 남자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우리 6학년 여자 아이들은 모두 커다란 급식실에 모였고 그날의 행사는 대대적인 것이었으나, 남자 아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은 대단히 비밀스러웠다. 너희는 나가. 축구하고 놀아라. 남자 아이들과 우리 사이에 벽 하나가 그어졌다. 우리는 달랐다. 그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뛰어노는 동안 우리는 몸가짐을 조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없던 그런 차이가 자라면서 생겨났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치심을 배우는 것이구나. 우리에게는 서로 말할 수 없는 벽이 생겼구나 하는 것을 그때의 나는 어렴풋이 느꼈을까?
어른들은 한편으로는 벽을 만들며, 한편으로는 무성적인 존재가 될 것을 강요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가장 성숙한 몸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었다. 혜림이는 1학년 때부터 여자, 남자를 통틀어 키가 가장 컸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에도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그만큼 2차 성징도 빨랐다. 그 ‘2차 성징’이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처음 배울 무렵이었다. 중년 여자였던 우리 담임은 조회 시간에 항상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여러 과목들의 내용을 복습시켰다. 반장인 혜림이가 그날 복습한 내용을 큰 소리로 반 친구들 앞에서 말했다. 여자는 사춘기가 되면 가슴이 나오고... 남자는 어떻고, 성기 주변에는 털이 자라게 되고. 각각의 어린이의 실제 성적인 성숙과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지와 실제 몸과 마음의 변화가 오는 아이들 앞에서 교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다른 문제이다. 5학년 때 초경을 했던 나는 혜림이의 목소리가 그 부분을 읽을 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에서 우리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법만을 배웠다.
엄마는 딸의 초경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종종, 엄마는 생리대를 처리하면서 팬티를 내린 채로 대충 밖으로 나와 버릴 생리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곤 했다. 나는 엄마를 보고 자랐으니, 보고 자란 대로 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났을까. 내 동생이 누나가 저렇게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둥,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화장실에서 팬티를 내린 채로 나왔다 들어가는데 엄마가 동생에게 그랬다. "다른 데 가서는 그런 말 하지 마" 그 말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엄마는 편하려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됐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화장실에서 생리에 관한 모든 걸 남자 가족들이 볼 수 없도록 처리했다.
생리를 하면서 나는 내 몸이 남자 아이들보다 부자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리를 시작할 당시 그 몇 년 간 학교에서의 교육 프로그램이 내 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짜였다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당시 학교에서 보여 준 성교육 프로그램에서 생리를 할 때 방 안에 누워 있지만 말고 움직이고 운동을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원래 생리를 할 때 사람들은 활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누워 있곤 하는구나. 그것이 정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그 이후 청소년, 어른이 된 이후에도 생리 기간에 활동적인 운동 등을 해야 할 때 나는 그 영상을 떠올리곤 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틀어 준 한 성교육 영상에서는, 월경을 시작한 아이는 남자아이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나의 몸과 행동을 스스로 제약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친한 여자 친구에게도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생리를 한다는 것을 어렵게, 간접적으로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 친구가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내가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생리를 시작했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나의 친구...
왜 여자들은 자기 몸에 대해 이렇게 숨기고 살아야 했을까. 그리고 어린 나는, 어린 우리는 왜 그렇게 자라야만 했을까. 지금의 자라나는 아이들은 얼만큼의 수치심을 삼키고, 또 자신의 몸의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깨닫거나 자신의 부끄러운 몸을 숨기며 순응하는 법을 또다시 배워 나가고 있을까. 여성혐오는 이 순간에도 대물림되고 있다. 이웃 아저씨의 눈길 하나, 학교 선생님의 잘못된 대응 한 번, 부모님의 악의 없는 ‘순진한’ 가르침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