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현 Sep 16. 2024

국가와 민족이라는 엉터리 수작

『그리스인 조르바』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한때 그리스 민족, 그리스 독립을 위해 터키인과 무기를 들고 싸웠던 조르바가 '나'에게 말한다. 당시의 조르바는 터키인의 귀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고 있던 터키고관을 죽인 조르바는, 며칠 후 구걸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다.


 대화를 통해 조르바는 그 아이들이 어쩌다 구걸을 하게 된 건지 알게 된다. 그들이 바로 자신이 죽인 터키고관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비를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조르바는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속으로 회의하고 절망한다. 조르바가 국가와 민족이 엉터리 수작이란 걸 깨달은 날은 아마 이 때인 듯 하다. 10대 때 이 문장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조르바의 이 말은 필자의 심장에 박혀 가지를 폈다. 필자가 가진 삐딱한 기질은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서술자인 ‘나’와 조르바와 겪은 일화에 대해 쓴 소설이다. 오로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기만 하는 지식인인 ‘나’는, 카프카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친구에게 “자신을 구하는 것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연설한다. 하지만 정작 행동에 나서는 건 친구였다. 그가 카프카스 독립전쟁에 참여하자는 제안에 '나'는 요지부동한다. 친구는 "안녕, 이 책벌레야!" 라는 말과 함께 카프카스로 떠난다. 책벌레라는 말에 자극 받은 '나' 역시도 현실과 뒤섞여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이 그의 친구처럼 전장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나'가 선택한 방법은 사업을 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크레타의 갈탄을 하나 전세 받기까지 한다. 사장이 무슨 세상과 뒤섞이는 삶이냐?고 반발할 수도 있을 듯한데, 뒤의 지나가는 듯한 묘사를 보면 그 역시도 직접 흙을 파고 갈탄을 캐기도 해본 듯 하다.


 '나'가 조르바는 크레타로 가기 위해 항구의 한 카페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만나게 된다. 조르바는 유쾌하고 정력적인 노인이었으며, 광부경력이 있고 무려 산투르도 연주할 줄 알았다! 그와의 대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탄광 관리직을 제안한다. 조르바는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산투르를 연주해달라는 명령은 하지 말라 강조한다. 또 연주 중에는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할 거라 미리 양해까지 구한다. '나'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또 조르바는 자신에게 윽박지르고 말라고, 즉 인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나’는 또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라고 되묻는다. 조르바는 말한다. “자유라는 거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자이다.’라는 명제는 이렇게 선포된다.


 크레타로 온 '나'의 상태는 사실 밥맛이다. 그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병에 걸린 듯도 보인다. '나'는 삶과 분리된 지식인으로써 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무언가에 빠져있었다. 그 일례로, '나'는 육체, 또 육체로부터 나오는 쾌락을 터부시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남들 몰래 소리 죽여 먹을 정도로 말이다. 조르바는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부터 마음에 두라며 점식을 먹자고 제안한다. 결국 '나'는 설득에 넘어가 행복한 만찬을 즐긴다. 조르바는 항상 이런 식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산투르 역시 앞뒤 생각 안하고 힘들게 모아두었던 결혼자금을 털어 산 것이다. 산투르가 눈 앞에 있었고, 연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르바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고 성장을 겪는다. 조르바는 자주 '나'에게 그까짓 책은 다 태워버리라고, 머리에 쓰레기 같은 것들 좀 치우라고 말하곤 한다. 오히려 그는 '나'같은 사람이 본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도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윽박 덕분 이었을까? '나'는 문인으로서의 활동에 잠시 휴지기도 가지고 크레타의 자연을 즐긴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것에도 더 이상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조르바야말로 진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력적이라는 의미는 조르바가 단지 에너지 넘치게 일을 한다는 의미만을 가지진 않는다. 그는 나름 성욕도 왕성하다. 결혼 -혹은 그것과 비슷한 것-도 여러 번 했다. 특히 과부를 품기를 좋아한다. 이렇게만 적어놓으면 그는 괴팍하고 주책바가지인 허풍선이 노인인 것만 같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렇게 단순한 인물은 아니다. 우선 탄광 관리인으로써 아주 유능하다. 동시에 휴머니즘을 이룩한 인물이다. 다만 그가 틈 만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고, 금욕주의 않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박애주의자의 표상과 큰 거리가 있을 뿐이다.


 우선 그는 천박한 민중들과는 큰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와 조르바가 크레타에서 만난 두 과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둘이 첫 번째로 만난 과부는 여관 주인이자 과거 인기 있는 카바레 과수였던 오르탕스였다. 그녀는 크레타 독립에 일조한 제독들과 친밀한 관계 내지 연인관계를 맺었다. 또 프랑스 제독의 크레타 폭격계획을 저지시키기도 했다. 오르탕스 부인은 크레타의 은인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이방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과부였으며, 애시당초 프랑스인이었고, 가톨릭교도였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조르바는 오르탕스를 꾀어낸다.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이후 '나'의 장난에 의해, 오르탕스가 조르바가 자신에게 청혼을 계획 중이라고 오해해버린다. 조르바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러워한다. 그녀의 오해에 사실 그의 책임도 없고, 실제로 그녀와 결혼을 해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오르탕스 부인은 병에 걸렸고 시름시름 앓다가 명을 달리한다. 반면 마을의 사람들은 남아있는 그녀의 죽음만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부인의 집 주위를 에워싼다. 몇 명은 부인이 죽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재산을 탈취한다. 조르바는 크게 애통해하지만 수 많은 아귀 때들을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


 두 번째 과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린치를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녀는 단지 마을 청년의 마음을 거부했을 뿐인데, 마을 청년은 자살을 해버린다. 그런 이유도 과부는 집단 폭행의 타깃이 된다. '나'와 조르바는 그 사람들을 막아 선다. 그 사람 중엔 실제 단검을 들고 과부를 죽이려던 사람도 있었다. 조르바는 그와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귀의 일부를 잃는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녀의 목은 단검에 의해 잘려 전시된다.  ‘나’와 조르바는 크게 상심한다. 과부를 죽인 남자는 끝까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역으로 조르바를 죽여버리고자 기회를 노린다.


 당시 과부에 대한 처우는 좋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성욕이 주책 내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성욕이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인인 조르바가 성욕이 있듯, 과부들도 성욕이 있다. 조르바가 과부들을 특히 신경썼던 이유는, 그런 과부들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천박한 민중들은 마을 사람들만이 아닌 종교인들도 포함된다. 크레타의 수도사들은 세속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걸 보고 조르바는 혀를 찬다.


 조르바는 춤을 좋아한다. 우선 그에게 춤이란 의사소통의 기능을 가진다. 과거 러시아에서 현지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자 춤으로 의사소통을 했던 경험이 있다. 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이 너무 격렬해지면, 또 말로 표현할 자신이 없으면 춤을 춘다. 조르바는 ‘나’에게 춤을 함께 추자고 여러번 권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여러 번 거절했고, 그럴 때마다 조르바는 안타까워하며 혼자 춤을 추곤 했다.


 사실 조르바와 '나'가 하던 사업이 또 있었다. 산 위에서 아래로 짐을 빠르고 편하게 옮길 수 있도록 케이블과 기둥을 설치하는 일이다. 그것 때매 특히 조르바는 골이 깨지도록 각도를 계산하고 크레타 밖으로 나가 물건을 사오기도 한다. 또 인부들과 함께 땀 흘려가며 구조물을 설치한다. 성공만 한다면 마을에 큰 도움이 되고 돈이 될 것도 분명했다. 건축이 끝나고 조르바와 ‘나’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시공식을 연다. 첫 번째로 기계를 작동시켜보자, 너무 빠른 나머지 마찰열에 의해 나무가 숯이 되어버린다. 세 번째 시연 때부터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네 번째 시도에는 기둥들이 폭삭 무너지고 만다. 명백한 실패. 둘은 그런 채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처량하게 고기를 뜯던 ‘나’는 “조르바! 이리 와 보세요! 춤 좀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한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춤을 가르쳐주다가 조르바가 말한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 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추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쳐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사업에 대한 실패를 통해 둘은 오히려 이익이니 상품이니 광산이니 하는, 즉 돈과 고용관계에서의 자유 또한 성취한다. 인간을 주조하는 것들을 쳐내고 또 쳐내고 보니 남은 것은 사랑과 춤 뿐이었다.


 이후 둘은 헤어진다. '나'가 먼저 크레타에서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아직 종이와 잉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조르바와 작별하며 그는 아직 내면의 악마가 책을 원하기 때문에 질릴 때까지 읽어볼 심산이라고 말한다. 크레타에서 떠나온 '나'는 책을 읽고 조르바에 대해 떠올리며, 그를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조르바는 세계를 누비며 틈틈이 '나'에게 전보를 보낸다. 그는 한 젊은 과부와 결혼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끝내주는 녹암을 발견했으니 당장 오라고 연락을 보낸다. '나'는 녹암 하나 때문에 어떻게 그곳을 갈 수 있겠냐고 회신한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끝났다. 더 시간이 지나, '나'는 조르바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가 유언하길 계속 ‘나’를 생각해왔으며 자신의 산투르를 ‘나’에게 남겼다고 한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최소한 작품 내에서 ‘나’는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 ‘나’의 인생은 바뀌었다. 어쩌면 그도 조르바처럼 산투르를 연주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언급했듯, 조르바에 의해 "인간은 자유다."라는 명제가 선포되었다. 이 명제에 입각하여 사유를 전개해보자. 우선 크레타 민중들은 어떤가? 오르탕스 부인, 또 다른 과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들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은 국가∙민족적 정체성에 얼마나 종속되어있다. 또한 세속적이며 짐승같이 과부들을 물어뜯는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어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두 명의 지식인상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나'고, 두 번째는 카프카스로 향한 '나'의 친구다. 우선 '나'는 지식의 저주에 걸려있는 듯도 하다. 친구한테는 타인을 구하는 것이 곧 자신을 구하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본인은 카페에 앉아서 책이나 읽을 따름이다. 그는 현실과 유리된 지식인이며 그러한 삶이 옳은 것이라고 여겼다. 골방의 지식인이 정녕 지식인이냐?도 흥미로운 논의거리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적거리는 따로 있다. 인간의 실존이란 '신체'로써 가능하다. 그가 지향하는 신성한 삶에는 실존성이 배제되어있다. 실존을 따지지 않는 휴머니즘은 존재할 수 없다. 카프카스로 나선 친구는 어떤가? 그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거는 숭고한 인물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들이 존재하고,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 국민들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친구와 함께 싸우는 동료들은 한 집안의 가정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이며, 사랑스러운 자식이었고, 소중한 형제이고 벗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였을 터키군 역시 동료들은 한 집안의 가정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이며, 사랑스러운 자식이었고, 소중한 형제이고 벗이었다.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 구성된 것이다. 최소한 국가는 구성원 개개인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국가는 수단이다. 하지만 사회는 개개인의 합보다 더 커지는 법이다. 결국 국가의 자기보존을 위해 구성원들이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되는 본말전도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민이 아니라 국민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민족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의사표현은 민족을 단위에서야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 민족주의의 기본테제다. 민족주의 역시 개인의 자기표현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관념 역시 인간의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앞세운 침탈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결국 민족주의라는 통해 단결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반응은 침탈자로 하여금 다시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또 다른 반작용을 일으킨다.


 국가와 민족의 수단이 된 개인은 주체적인 판단과 행동능력을 박탈당한다. 심지어 누군가를 죽일 때 조차도 죄책감을 느끼긴 커녕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사명을 완수했어.’라고 생각하며 충만함을 얻는다. 인간은 자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은 구성원들을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모시킨다.


 제국주의가 횡행하였던 피칠갑 된 역사. 우리는 거기서 서구국가가 나빴다, 혹은 제국주의는 악이다라는 수준의 사고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 물론 열강과 피식민국가 중 책임을 저야할 쪽은 응당 열강이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괴물이 존재하는 한, 또 우리가 그런 엉터리 수작에 넘어가있는 한 인류는 언제나 짐승상태로 진입할 준비가 되어있는 셈이다. 필자는 독립운동가들을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지사로써가 아닌,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로서 존경한다.


 



 조르바는 국가와 민족, 당대의 관습과 도덕. 심지어 돈과 계약관계, 사업으로부터 까지 해방된다. 그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이 자유란 절대 방종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조르바는 인간의 족쇄가 되는 모든 것과 분투한다. 그 결과 남은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관념이다. 조르바는 어쩌면 인간의 이데아일지도 모른다.


*인용은 모두 열린책들 판본을 참조함

이전 16화 자본주의에서의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