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빛은 온기이고, 이성이며, 질서이고 또 생명이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시각을 잃게 된다. 시각이 사라진다면 이성이 마비된다. 즉 앞날을 예측하고 무엇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예측과 통제는 곧 이성의 소산이기도 하다.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가 이성임을 상기해보면 이는 단순히 개인적 위험이 아니다. 어둠은 곧 종적인 차원에서 선험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빛을 주는 -또 생존에 필수적인 열에너지를 주는- 불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불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생물사적 혁명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불이 닿지 않는 곳에는 아직 미지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불을 들고, 온갖 도구와 무기를 들고 자신들의 거처를 떠나 세상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불과 이성으로 자신들의세계를 넓혀가며 그림자를 몰아내는 것이다. 문명이란 미지의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형성된 것이고, 역사란 인류가 미지의 공포를 제거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너 나아가 약자들을 정복하고 짓밟은 유럽인들의 반인륜적 행위들은 결국 그러한 까닭에 벌어졌다.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의 숙명이다.
이제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인간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인간들이 뭉쳐 만들어진 사회라는 공간 역시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있다.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측면을 각각 표상과 의지라고 이름붙였다.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고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 라캉은 상상계와 실재계라고 불렀다. 물론 이 철학자들이 생각한 개념들이 서로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전자는 빛으로 표현되며 후자의 것들은 어두운 무언가로 논의되어온 건 동일하다. 빛과 어둠 중 무언가가 먼저 생성되었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빛이 밝을 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이번 글에서는 빛의 측면을 공적이라고, 또 어두운 부분은 사적 측면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빛의 세계란 곧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의식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빛의 제국』라는 이름은 김영하의 소설 제목이지만 또 붙이기 아주 적절한 대상이 있다. 바로 『멋진 신세계』다. 계급사회를 운영하는 『멋진 신세계』의 세계정부는 완벽히 내부를 통제한다. 각각의 계급은 사회 내에서 정해진 역할이 있으며, 그에 걸맞도록 만들어진다. 필요한 노동력은 계산에 맞게 생산된다. -완벽하진 않지만- 세뇌와 소마라는 이름의 약품을 보급하여 사람들을 통제한다. 아직 세뇌가 불안정한 경우가 왕왕 있다는 점만 빼면 세계 정부는 완벽하게 합목적적으로 구동된다. 저 세뇌가 불안정한 것도 큰 문제는 없다.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필수적인 육체노동을 하는 하층계급은 애시당초 불만을 가질만한 지능도 없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세계정부는 사회를 훌륭하게 예측하고 통제한다. 이는 사실 세계정부의 통제를 받는 개개인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 역시 쉽게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그저 체제에 순응하면 된다. 많은 독자들은 『멋진 신세계』를 읽고 공포감을 느낀다. 또 이것이 올더스 헉슬리가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독자들은 그런 공포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멋진 신세계』가 위대한 예술인 이유인데) 그럴 만도 하다. 최소한 세계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림자의 짙음은 빛의 환함에 비례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강렬한 빛, 그 이면에는 상응하는 만큼 짙은 그림자가 있다. 그 시대를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도 향수를 느끼는 빅토리아 시대, 에포크 시대, 다이쇼 시대. 열강들의 황금 시대는 약자들의 황금색 고름으로 이룩되었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아직 상상력의 산물이다. 현실과 오늘 날의 사회는 분명 빛의 제국이지만 아직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했던 것만큼 철저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날의 사회가 얼마나 밝은지다.
공적세계에 노출됨은 끊임없이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운동을 하는 것만큼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충분히 이완되지 않은 근육은 신경을 눌러 통증을 일으킨다. 근육이 뭉치면 운동을 해도 효과가 없다. 근육은 원래 긴장과 이완의 반복을 위해 설계되어있다. 그런 근육 조차도 이렇게 긴장에 취약한데, 마음은 어떨까? 빛을 오래 받은 마음은 언젠가 시린 눈을 감게 될 수 밖에 없다. 긴장은 이렇듯 엄청난 힘을 쓰는 일이다.
인간은 밤이 되면 감정적으로 변한다. 이는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선험적 메커니즘이다. 긴장호르몬으로 유명한 코르티솔은 밤이 되면 방출량이 감소한다. 반면 개체를 이완시키는 멜라토닌의 분비가 증가한다. 즉 인간은 빛 속에서는 긴장하고 어둠 속에서 이완한다. 또 낮과 밤이라는 하루에 두 일이 동시에 이뤄져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 프라이버시를 찾는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이완은 빛의 역이다. 빛 속에 사는 일이 남과 동일해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인물은 사회에서 배제된다. 그러니 자유란 본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커튼콜이 끝난 무대 뒤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러한 시공간적 배경에서 마음을 이완시킴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성취된다. 마음을 이완한다는 건 곧 빛을 받기 이전의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 없이는 본래적 자아를 찾을 수 없다. 자아란 언제나 타자와의 대립과 분별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남과 동일해지는 일이다.
그림자 속 세계는 눅눅하다. 외벽에 곰팡이가 펴있고,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하지만 수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했듯, 그 세계는 우리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할 세계이기도 하다.
『빛의 제국』은 어느 날 아침 7시부터 다음 날 7시까지, 주인공 김기영과 그의 가족들이 겪는 24시간을 추격하는 소설이다. 본래 김기영이란 남자는 두통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일어서면서부터 두통을 느꼈다. 마치 어떠한 징조처럼.
우선 스탠드를 돌려 김기영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의 “인생은 둘로 정확히 나뉘어있다. 전도양양한 평양외국어 대학의 영어과 학생이었던 절반과 조용히 비합법적 이민자로, 자발적 고아로 살아온 나머지 절반은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은 퍼즐처럼 분리되어 나뒹굴고 있다.” 김기영은 자신을 포함해 직원 두명이 있는 작은 영화수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름 중박도 차는 이 회사의 대표이자 사장이며 가족도 꾸린 김기영은 일단 중년 남성처럼 나잇배도 나오고 근육이 있던 팔도 점점 물렁물렁해지고 있다. 겉보기에 그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하지만 그 페르소냐를 벗겨보면 남파 공작원이라는, 북한 간첩이라는 정체가 숨겨져있다. 그는 다른 간첩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 제공해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평양으로부터 연락이 끊긴지는 10년이 넘었다. 그는 남한에 훌륭하게 적응했고 가족이라는 뿌리도 내렸다. 심지어 북으로 돌아갈 거란 생각도 해보지를 않았다. 김기영은 남한사람들보다도 더 남한사람이 되었다. 공적 세계에서 그는 남한의 평범한 중년 가장이지만, 사적 세계에 그는 남파 간첩이라는 직위, 집에서 자살한 어머니를 발견했다는 트라우마, 남한에서의 경험, 가족에 대한 애정등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존재다.
그의 일상은 ‘4번 명령’이 내려오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4번 명령이란 당일 새벽에 북한으로 귀환하라는 내용이다. 김기영은 시름에 빠진다. 돌아가야할까? 말아야할까? 누가, 어떤 의도로 보낸 명령일까? 이러한 고민은 김기영의 마음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 곳곳을 나다닌다. 자신에게 미행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 일부로 헤매기도 하고, 같은 간첩 동기와 몇 년만에 재회하기도 한다.
김기영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자신의 집 지하 주차장이었다. 그곳에서 아내인 마리를 만나 자신이 간첩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의견을 구한다. 돌아가야할까? 말아야할까? 집이 아니라 집 밖에서 둘은 서로의 진심을 이야기한다. 서로의 내밀한 마음과 의견, 즉 사적세계를 공유하는 것이다. 마리는 자신은 북한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녀는 김기영한테 남한에 자수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압박한다. 혼자 북한으로 떠나버리는 것이 딸인 현미를 위해 최선이라는 의견에서다. 본인도 알진 못했지만 김기영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마리에게 왜 자신을 붙잡으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냐고 따지고, 이후로는 딸에게 두 부모 중 누구를 따라야할지 결정하게 해야한다며 심술 -이렇게 표현하면 김기영에게 미안해지지만- 을 부린다 . 왜 자신에게 어떠한 선택도 보장해주지 않냐는 불만에서 나온 행동이다. 서로의 상반된 진심은 부딪히고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김기영의 사적 자아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의 가면 뒤에는 북한 간첩이자 아내가 자신을 한 번이라도 잡아주길 바라던 남자가 있었다. 이번에는 마리의 가면을 벗겨보자. 그는 자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 정사도 여러번 나눈 듯 하고. 마리는 자신의 남편과 항상 소통이 좌절되는 경험을 겪었다고 그 날 밤 토로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영과 자신 사이의 담벼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았다고 한다. -소설에서 정확히 언급되지 않지만- 이것이 마리가 바람을 핀 이유기도 하다. 좌우지간 마리는 자신의 외도남과 그의 친구와 함께 난교를 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진심을 털어버린 이유는 김기영을 북한으로 보내 버리기 위해서였다. 자동차 매장에서 일하는 마리의 사적 자아에는 문란한 외도녀가 있다.
집이라는 공간은 본래 사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가족이 생기는 순간 집은 그 어느 곳보다 공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한 완전한 이완은 불가능하다. 아침 일곱 시, 김기영과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는 순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물소리같은 집 안의 어떠한 소음들이 항상 그들의 대화와 말소리를 몇 번씩 차단한다. 가정이라는 공간은 어떤 짓을 하여도 공적 세계다. 이렇듯 공적 세계에서는 진심을 얘기하는 것 만이 아니라 대화 자체도 차단된다. -기영과 마리의 딸인- 현지는 어떤가? 그는 자신과 같은 학년인 남학생과 키스를 했다. 그의 집에서 말이다. 그 남자아이는 자신의 방에서 함께 사는,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존재를 모르는 철이라는 동갑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번 언급한다. 현지는 철이의 존재여부를 의심하지만 뭐, 남자아이가 철이에게 자신이 여자아이와 키스를 나눴다고 얘기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는가?
김기영은 체포된 이후 자신의 유일한 부하직원 역시 국정원 요원이란 걸 알게 된다. 자신이 분명 자본주의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영은 결국 눈치채고 말았다. 자신의 성공은 사실 국정원의 기획 하에 유도되고 조작되어왔음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이 수입해온 영화들이 적당히 흥행한 것 마저도. 즉 직장이라는 그의 공적 세계는 정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받고 감찰받고 있던 건 그의 사적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국정원에서는 진작 기영이 간첩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후 알뜰히 써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외도남과 문자 하나 나누는데도 방심하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집에서 나가면 욕실로 들어가 문자를 확인하고 본다. 가족들이 올 리 없는 회사 점심시간에 외도남을 만난다. 그는 자신의 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인호텔로 향한다. 실 무인호텔이라고 스스로를 홍보하던 장소에는 상주하고 있는 60대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건물 1층에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놓고, CCTV를 통해 모든 방과 로비를 감시했다. 그 덕에 마리와 그녀의 외도남들은 무인호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2인이 예약을 해놓고는 3명이 들어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60대 남성은 이후 국정원 요원에게 위치를 들키고 하드디스크를 빼앗긴다. 무인호텔이라는 내밀한 공간 조차도 어떠한 기획자가 존재하는데, 국가는 이러한 기획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감시자는 다른 감시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변태새끼라고 욕했던 국정원 요원도 김기영을 잡기 위해 마리를 미행하던 자였다.
김기영과 마리는 도시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알고 있다. 신발을 벗고 절둑거리는 여성에게 조차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는 공간이 바로 서울이다. 서울은 이렇듯 세련되고, 쿨하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상기한 사적 세계 조차 빛의 제국에 통합되었음을 밝혀주는 『빛의 제국』의 배경적 장소가 서울 곳곳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김기영은 밤 11시 자신을 체포하러온 국정원 요원들에게 말한다. “집이 지옥이 된다는 건. 그건 정말 너무 끔찍한 겁니다.” 나는 조소한다. 그걸 마흔이 다되어서야 알다니. 가족도 결국 남인데.
북한과 남한 사이에 지정학적 실선을 넘어선 균열이 있듯, 모든 사람에게는 균열이 있다. 공적 차원과 사적 차원의 균열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적 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사실 빛의 제국에 의한 영향력 아래 있다. 북한의 행보가 남한에게, 또 미국에서 낱낱히 파악되고 있듯, 우리의 은밀한 모든 것들 역시 공개적인 무언가다. 온갖 광고 전략과 알고리즘은 우리들의 욕망과 자아마저 기획한다. 우리는 이완되고 있다고 믿는 곳에서조차 긴장된다. 우리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가족들의 눈에서 벗어났던 가족은 아침 8시 모두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만나게 된다. 형광등 아래에서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기 시작한다.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게. 국가는 빛의 제국이다. 가족 마저도 빛의 제국이다.
사회라는 눈이 부릅뜨고 있는 곳에서 우리는 공적 자아를 활용한다. 이런 공적인 세계과는 반대로 사적인 세계가 있다. 사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공적 자아가 아닌 또 다른 자아를 발현시킨다. 마치 기영의 가족들이 부모가 없는 남자의 집에 가고, 장마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어린 연인과 골목의 모텔로 들어가듯 말이다. 이 사적 세계에서 기영은 자신의 또 다른 면모 -혹은 진짜 면모- 를 드러내는 듯 하다. 하지만 결말에 가서는 그의 정체가 이미 남한에 의해 파악되었음이 밝혀진다. 사적 세계, 그림자 속 공간도 실은 사회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나의 본래모습이라고 여기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기획되고 통제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글, 카카오, 네이버등의 거대 기업들이 알고리즘을 이용해 아닌 척하면서도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진심은 과연 통할까? 소설 후반부, 기영과 마리가 서로의 진심을 드러냈을 때를 떠올려보자. 커튼 뒤에서 벌어진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절단낸다. 예측되고 통제받지 않은 개인들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산산조각날 수 밖에 없을까? 아니면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둘은 복원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것인가?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측하지 못한 것이 두 개 있다. 첫 번째는 이제 국가가 아니라 한낱 기업이 빛의 제국을 운영하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순순히 자신들의 자유를 건네줄지 몰랐다는 것이다. 필자가 나고 자란 한국은 개개인에 대한 통제성이 매우 강한 국가다. 용의자가 어디로 도망치던 CCTV로 쉽게 위치를 찾아낸다. 모든 국민의 지문을 수집하고, 주민번호와 등록증을 등록하는 나라는 흔치않다. 어떤 나라들은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국의 경우, 투표를 위해서는 운전면허증이 필요하다. 물론 필자와 같이 차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다. 운전을 못해도 투표권을 보장해주니 말이다.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타이틀을 위해 국민들은 자유와 자아를 잃었다. 이는 분단과 그로 인한 역사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필자는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생각도 없다. 그것이 이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더라도, 그러한 특수성을 통해 육체적으로 안전한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건 사실이며 이는 장단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 당시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감염자의 동선을 철저히 추적해 -익명이 아니라 번호로 부르긴 했지만- 대중에게 공개했고, 마스크 사용을 사실상 강제했다. 이는 개인이 가진 기본권과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물론 공동체가 큰 위협에 빠지면 개개인 역시 어려움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상황에서 사회 구성원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 덕에 우리나라는 비교적 작은 피해로 코로나 상황을 보냈다.
필자가 위협을 느낀 건, 그러한 조치가 너무 당연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다. 신속한 조치는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 어떠한 논의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한국의 공론장에서 정부의 방역조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등장하지도 못했고, 목소리를 냈더라도 정을 맞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코로나 시기 마스크 착용 정책을 두고 벌어진 서구의 시위를 보고 이기주의자에 멍청이들이라고 낄낄거렸다면,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을 보고 자유와 권리란 것을 모르는 바보라며 경악했으리라.
세상은 자유롭기엔 너무 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