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제까지 낭만적으로 취급되고 묘사되어 왔다. 이러한 관습은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이는 사랑을 철저히 물질과 분리된 관념으로 취급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랑 역시 시장의 영역에 집어삼켜졌다.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명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언급되기 시작할 때 필자는 그러한 징후를 느꼈다. 물론 아직 사랑을 물질로 치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행위가 되곤 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것이든, 아니면 연인이나 부부 사이의 것이든 말이다. 하지만 나날살이를 보면 그런 지탄은 단지 겉치레가 아닐까, 의심이 들고 만다. 결혼, 연애, 양육, 이를 넘어서 단순히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일조차도 감각되는 조건에 따라 허용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사랑이 가장 물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이 이러한 현실을 -과장되었을지언정- 선명히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구의 증명』은 유물론에서, 또 그에 기반한 자본주의라는 전제가 당연시되는 세계에서 사랑은 결국 어떠한 형태가 될 수밖에 없는지 묘사한 작품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는 일이 이번 장에서 필자가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자본주의가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체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베버와 뒤르켐 등의 사회학자들은 마르크스에 반대하여 자본주의에 내재된 관념론적 성격을 지적하긴 했다. 그들의 논거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유물론과 관념론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최소한 오늘날까지는- 전자였다. 자본주의는 유물론적인 체계라고 인정받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에게 하부구조란 당연히 물질이었고, 그 위에는 관념이 위치해있다. 이에 따른다면 사랑이라는 관념도 결국 물질에 의한 부산물일 뿐이다.
더불어 21세기의 사람들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유물론적 언행과 사고방식이 몸에 베어있다. 과학과 실증주의에 대한 개개인의 신뢰 혹은 오류 있는 도그마는 점점 확장되고 있다. 그 결과 결혼중개업체는 아주 깐깐하게 사람들의 외적 요소들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혼에 있어서 재산분할은 비싼 전문 변호사를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되었다. 어떠한 체계든 믿음에 호소하는 명제를 기반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은 이제 지탄받아 마땅한 멍청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사랑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 세속세계로 끌어내려졌고, 신체의 호르몬 작용으로 분석되고 정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숭고함과 신비함은 철저히 분해되고 말았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이 문장은 『구의 증명』의 핵심에 위치하는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담은 결국 저 말을 실행에 옮긴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최진영이 상상해 낸 자본주의에서의 사랑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담은 자신이 사랑한 구가 죽자 그의 머리카락부터 조금씩,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식인, 상대가 이미 죽어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오늘날에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위는 아니다. 식인은 우리에게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일로 취급받는다.
작품은 구와 담이라는 두 남녀의 단상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내던 둘은 모두 빈곤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후 각자의 삶 때문에 꽤 오래 떨어져 있긴 했다. 결과적으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담도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보긴 어려웠는데, 성인이 된 구는 행방불명된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공권력에 기대본 적도 있지만 무지막지한 사채업자에게 법이라는 무기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를 원양어선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운다. 그걸 눈치챈 구와 담은 도피를 감행한다. 언젠가 구는 자신이 담의 삶도 망칠 거라 생각해 그녀를 떼어놓고자 한다. 하지만 담의 태도는 완강하다. 결국 둘은 몇 년이나 지방을 떠돈다. 그러던 중 구는 사채업자들에게 붙잡힌다. 그들에게 폭행과 고문을 당하던 구는 겨우 도망치지만,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담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길가에서 시체가 되어버린 후였다. 원래 그녀는 구가 죽으면 함께 죽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마음이 변했다. 죽어봤자 사채업자에 의해 몸과 장기가 낱낱이 분해되고 팔려나가기밖에 더 할까? 결국 담은 구를 먹어 치우고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 누구들보다도 오래오래.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남는 것 말곤 방도가 없었다. 담은 구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 치우며 그녀만의 장례를 진행한다.
작품의 제목이 『구의 증명』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식인에 대해 먼저 말한 쪽은 바로 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담에게 아일랜드의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요지는 대략 '식인 자체가 과연 비도덕적인 행위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최소한 구는 담에게 식인이라는 행위를 설득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장면과 작품의 전반적인 태도, 분위기를 고려해 보면 결국 작가인 최진영이 우리에게 묻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구의 증명』은 식인 행위가 비도덕적이지 않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적어도 담에게는 구의 말이 참이었고, 이게 공감할 수 있는 독자에게도 참이다.
그렇다면 식인은 언제, 어떠한 배경에서 용인될 수 있을까? 최소한 최진영은 이를 위해 자본주의라는 -지극히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다. 이 작품의 문장은 무척 서정적이다. 더불어 사랑이라는 정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관념적인 단어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관념적인 단어는 작품 말미에 '혼'이라는 단어로 단 한 번 등장한다. 오히려 작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몸'이다. 구와 담이 겪는 '가난'이라는 상황은 지극히 물질적이고 문명화된 고난이다. 그들의 가난은 당장 먹고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가난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사야 하는 환경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 문명이 이렇게 발전하기 전 사람들이 자연에서 식재료를 구하는 일은 자주 있어왔다. 하지만 모든 땅과 생명이 사유화되고, 문서에 기록되고 이를 철저히 감시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돈 없이 제대로 된 식재료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또 전술했듯 그들이 떠도는 이유 역시 사채업자 때문이다. 구가 죽은 이유는 돈을 갚지도 못해서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세계, 또 자본주의의 세계에 영혼, 인권 같은 무형의 가치는 틈입할 수 없다. 그리고 본래 이러한 세계라면 사랑 역시 긍정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담은 구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육체와 그를 통한 행동이 곧 진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방법을 찾는다. 담은 결국 냉혹한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결국 상대의 몸을 먹어 치우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와 한 몸이 되고 물질적으로 결합하는 것. 괴짜스러운 상상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유물론의 세상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런 방법뿐이다. 이렇게 사랑은 자본주의의 세계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구의 증명, 어쩌면 최진영의 증명은 성공했다. 최진영은 자본주의에서 사랑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구와 담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과 『구의 증명』이 증명하려는 것은 같다. 식인이라는 행동의 본질은 악이 아닐 수 있다. 최소한 물질만이 인정되는 세계, 인간보다 돈이 우위에 서는 세상,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배제되는 시공간에 한해서만은 그러하다. 영혼, 인간의 가치, 인권, 사랑 따위는 모두 눈에 보이지도, 감각되지도 않는다. 결국 구가 자신의 마음을 증명할 방법은 사랑하는 대상을 몸이라는 동일한 물질로 결합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과 비교해 보면 이는 분명 모순이다. 식인이라는 악행이 어떻게 인정받고 사랑과 결합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에 설득되는 것 역시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구의 증명』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모순은 충격적이고, 충격은 이따금 아름답다. 『구의 증명』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작품의 말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구의 단상이 마치 죽은 이후 영혼이 말하는 것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영혼이 존재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식은 가져볼 수 있다. 사랑을 이러한 방식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세계가 과연 옳은가? 차라리 돈보다 영혼을 믿는 세상이 낫지 않을까? 오늘만큼 사랑이 해체된 시대는 없다.
-꼴에 에세이니까- 여기서 필자의 괴팍한 기벽을 하나 언급하고 싶다. 사진에 찍히는 게 싫고 찍는 것도 싫다. 자료를 모으거나 기억해야 할 때 빼면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공연에 가서 핸드폰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나 박물관, 미술관에 가서 사진을 열심히 찍는 사람을 보면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짜증마저 날 때가 있다.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다. 커튼콜에 대부분이 기립했지만, 대부분이 영상을 찍기 위해서지 박수를 치진 않았다. 그에 대한 반감 때문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박수를 치느라 한참이나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러한 성향은 사진을 찍어도 다시 보진 않는다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한 것이다. 이유는 또 있다. 복제 기술의 발전이 작품에 대한 존중을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현장의 아우라가 중요한 예술마저 말이다. 이런 존중에 대한 감소는 예술 작품이나 유적, 유물만이 아니라 감정이나 인간도 대상으로 한다. 사진으로 무언가를 남기는 것보단, 그것이 내뿜는 아우라와 스스로의 인상을 최대한 느끼는 걸 더 선호한다.
필자가 사진을 찍히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스스로의 외모에 자신감도 없고, 찍었다고 본 적도 없다. 그리고 최근에 깨달은 바는 사진이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감정 역시도 해체시킬 것이란 두려움이 오래전부터 내면에 있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는데, 이는 기록이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필자가 소크라테스처럼 강경하게 언어의 필요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기록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상기시키는 행위를 감소시킨다는 건 확실하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 보자. 요즘에는 수많은 기록물을 통해 누군가를 더듬어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게 훨씬 쉬워진 것이다. 디지털 사진만 있다면, 전자제품을 가진 한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일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필자에게는 존중의 감소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기억을 잃어갈 때마다 크게 비통해하는 것. 그것이 더 큰 존중이고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가 언젠가 누군가와 사랑하게 된다면, 절대 사진을 남기고 싶지 않다. 만약 먼저 죽는 게 자신이라면, 평생 나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슴 깊이, 온 영혼을 다 해 비통해해 주길 바란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라보니 이런 몰골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