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해당 부분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선 내용들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계몽의 변증법』의 앞선 부분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책은 20세기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동 저작인데,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은 아도르노가 주축이 되어 작성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제목 그대로 ‘계몽’을 ‘변증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 여기서 계몽이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미지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즉 인류 지성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지목되는 미지란 보통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또 여기서의 변증법이란 헤겔의 그것과 같은 도식을 가진다. 이는 동일한 체계 내의 모순이 지적되고, 상반되는 요소들의 화해를 통해 진보를 이루는 운동을 일컫는다. 헤겔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역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변증법의 부정적인 면면들이 강조된다. 즉 헤겔의 변증법이 긍정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저자들의 변증법은 부정을 밝혀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들이 밝혀낸 계몽의 모순은 먼저 자연의 수단화다. 결과적으로 계몽은 ‘일관성 있는 나의 자기보존'을 추구한다. 나란 곧 주체이고, 주체는 타자를 자연스럽게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타자는 주체를 위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점이다. 또 계몽은 자연을 적대하는 듯하지만 스스로 자연과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자연을 지배 대상으로 본 베이컨이 이러한 계몽의 테제를 대변한다.
둘째, 자기 파괴성이다. 그들은 “신화=계몽”이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신화 역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즉 본질적으로 둘은 동일하다. 역사적으로 계몽은 신화를 파괴하였지만, 신화 역시 계몽이었다. 이 자기파괴는 다른 측면으로도 작동한다. 계몽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역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계몽의 수단인 변증법적인 화해가 화해를 가장한 폭력적인 통합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에 이성이 어떻게 설명되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성은 개별 요소들을 체계화시키는 능력, 또 특수자에서 보편자 -동일자-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문제는 이성이 수단화되었다는 점이다. 계몽의 자기보존과 맞물려 이성은 외부의 것을 억척스럽게 먹어치우는 도구가 된다. 화해로 보인 변증법적 진보는 사실 폭력적 통합이었다. 즉 '합'에서는 여전히 긴장과 대립이 존재하게 된다. 또 긍정되지 못한 개별자와 특수자들은 부정된다. 이 부정이란 그것이 옳냐 그르냐의 문제를 포괄하고 또 넘어서서, 그것이 존재해선 안된다의 차원의 부정이다. 그리하여 나치는 유대인을 쓸어버리고자 했고, 현대의 어떤 소수자들은 -양진영의 선공여부와 책임소지를 떠나서- 박해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몽이 자신의 적대자인 자연과 같아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은 『계몽의 변증법』이 출판되기 이전, 호르크하이머가 앞으로 자신이 전개해나갈 철학의 개요적인 설명을 진행한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이라는 논문에서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논문에서는 이러한 예가 등장한다. 봉건사회의 신분제와 자본주의의 계급화 모두 인위적인 산물이다. 하지만 문명에 따른 부조리는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것으로, 마치 자연처럼 인식된다. 문화산업은 현실을 모방한다. 하지만 이 현실은 부조리하고 인위적인 현실이다. 인위적인 것이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부조리한 계몽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의미와 같다. 즉 계몽은 자연이 되어 부조리를 체념시킨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계몽의 최전선에 있다. 또 계몽 역시 신화시대부터 자본주의의 싹을 잉태하고 있었다. 숭배자들은 결코 순수한 목적으로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떠한 이득을 바라며 제물을 바친다. 이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논리다. 다만 현대와 그때의 차이는, 이제 신 대신 자신을 위해 제물을 바친다는 것이다. 이 제물은 자연이고 타인일 수도 있지만, 자기자신의 일부일 수도 있다. 이것 역시 변증법적이다. 인간을 위한 도구인 계몽이 인간에 대한 폭력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자기보존을 위해 자신의 변화 혹은 잃음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본주의=파시즘'이라고 선언한다. 이 명제는 오늘날에도 충격적이다. 조금 더 파헤쳐보자. 자본주의와 파시즘이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있는데 ‘관리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당연한 세상으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관리되는 세계는 그러한 희망과 대척점에 있다.
그럼 자본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관리하는가? 이를 중점적으로 탐구한 것이 바로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는 파트이다. 이에는 여러 수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도르노는 특히 문화 산업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한다. 문화산업은 보통 예술이나 유흥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이 두 역할 모두 수행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미학에 대해 살짝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는 긍정을 통해 부정을 표현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긍정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양식이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며, 후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요소들을 일컫는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들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여야만 한다.
이상의 예로 아도르노는 주로 비극이라는 장르를 언급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나 『간계와 사랑』등게 아닐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론 「인간 실격」같은 소설도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예술상의 예가 아닐까 싶다. 이 세 작품 모두 사회에서 긍정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도록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간계와 사랑』는 『에밀리아 갈로티』라는 고전작품의 구성과 양식을 본떠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둘은 철저히 긍정을 따른다. 허나 소설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사회적으로 부정되어 오고 터부시된 자들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간계와 사랑』는 계몽주의 사회에서 부정시 된 감성적인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다뤄지며 이들을 연민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인간 실격」의 경우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부정적으로 간주되고 때론 외면 받는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비겁함과 비굴함 따위를 전면적으로 부각한다.
문화산업은 예술의 형식을 빌려온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비극의 형식을 빌려온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다만 이는 팔리기 위해서이지 작품성이나 진정한 미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산업의 설계자들은 창의성을 오히려 배척한다. 제작자들에게 허락된 것은 더 많이, 또 오래 팔리기 위한 창의성이다. 작품성이 있더라도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없는 창의성은 배제된다. 본래 부정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예술은 부정에 대해 침묵한다. 그 대신 긍정만을 또다시 반복하여 보여줄 뿐이다. 이를 통해 대중은 현재의 삶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문화산업은 유흥에 더 가까워 보인다. 확실히 문화산업은 휴식 시간에 가볍게 소비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유흥은 사람의 노동을 멈추고 긴장을 풀어주는 재충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유흥이 되려 인간을 소비하게 된다. 오늘날의 휴식은 강요된 휴식이다. 온갖 광고를 통해 우리들은 마치 어떠한 제품을 구매하거나 체험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그렇게 경험하는 유흥은 재충전이라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소비에 가깝다. 노동이 끝난 시간에 사람들은 문화산업을 통해 노동을 망각하게 만든다. 휴가기간 동안 우리는 일본을 가야할 것같아서 일본에 가고, 베트남에 가야 할 것 같아서 베트남에 간다. 이는 마치 퇴근하고 술을 거하게 마신 후 다시 출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강요된 문화산업은 유흥이라기 보단 노동의 연장이다. 공장의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듯, 인간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돈의 순환이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이렇게 소비된 개인은 더 이상 예술을 감상할 여유도, 성찰할 힘도, 마르크스의 말처럼 단결하고 혁명을 일으킬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상기의 이유들로 문화산업이 대중 기만인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이 대중 기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감상자들의 욕구를 해소해 줄 것처럼 굴면서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은 포르노그래피와 비슷하다. 우선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프로노그래피를 통해 사람들은 성욕을 해소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포르노그래피의 해소는 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해소가 아닌 일시적인 해소일 뿐이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밖의 세상은 그러한 욕망을 억압한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은 사람 개개인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더 위험한 무언가로 왜곡시킨다.
또한 위에서 언급하였듯 계몽은 자연이 된다. 문화산업은 긍정을 끊임없이 긍정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에게 어떠한 인상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문명의 부조리는 대중문화를 통해 자연으로 변모하여 대중을 체념시킨다.
바로 위에 문화산업의 예로 포르노그래피를 들었다. 물론 문화산업의 예로 들만한 것은 포르노그래피만이 아니다. 또 다른 친숙한 예로 소위 ‘신데렐라물’을 들 수 있다. 신데렐라물은 우리에게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해소시켜준다. 실제 역사적으로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대리 만족시켜준 다는 점이 로맨스 장르의 발흥과 흥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시청자 중에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적다. 오히려 그러한 작품들은 신데렐라가 되지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를 세뇌한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보통 티비, 영화,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에 있어선 엘리트주의자였다. 그의 생각과 달리 오늘날에는 문화산업이 고급문화로 여겨졌던 출판시장도 잠식했다. 한낱 잠깐의 위안만을 주기 위해 짜여진 책들과 지식과 학문을 천박하게 만드는 교양서적, ‘행운’을 노력으로 탈바꿈시키는 자기교양서적들이 서점 매대를 더럽히고 있다. 작가들은 자기보신적인 글쓰기를 하며, 평론가들은 그러한 비겁함을 '탁월한 균형감각'이라고 찬미한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능력을 잃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에서 자신들이 분리된 것처럼 여기는 지식인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여전히 그러한 지식인들이 많다. 문제는 사회에 기생하여 비판이라는 의무를 수행하기보단,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는 새로운 지식인의 유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일련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족속들은 반지성주의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중산층 지식인-혹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진보집단- 무의미한 발언을 하는 것이 유일한 존재 의미인 사회 운동가들과 대안 우파다. 심지어 자본주의 체계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존재인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는 노력으로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세상에는 입지전적인 인물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인물들은 자본주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자들은 어느 정도 선택되어 전시된다. 그러면 대중들은 아직 사회는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어버린다.
더불어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아웃사이더로 몰아간다. 실제 이 장에서 아도르노는 기득권층이 반사회적인 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서술한다. 이전에 반사회적인 자들에게 지배층이 물리적인 형벌을 내렸다. 허나 이제는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다만 그 자유는 사회에 순응하냐, 아니면 아웃사이더가 되냐의 선택지만을 준다. 한 인간을 아웃사이더로 만들고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물리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잔혹한 형벌일 지도 모른다.
-스케치로 남은 짤막한 글들을 제외하면- 『계몽의 변증법』의 마지막은 지금까지 저자들이 비판한 요소들을 ‘티켓사고’라는 한가지 단어로 종합시키고 그를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체 게바라가 프린팅 된 티셔츠를 사 입고, 무지개 혹은 환경보호단체의 로고가 그려진 에코백을 들고 다닌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인의 신념이나 사고방식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미리 계획되고 우리에게 제시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상품을 구매하는 것뿐이다. 만약 그 외의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는 사회에서 부정되고 소외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는 파시즘이다.’라는 명제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생각조차 이미 제시되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계획된 티켓에서 선택 -혹은 구매- 하여야 한단 점에서 자본주의는 파시즘적이다. 이는 선택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이 아니다. 선택지는 강요되었으며 선택해야한다는 것도 강요되었다. 애초에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었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그 존재 자체적으로 기만적이다. 자본주의는 파시즘보다 세련화된 전체주의일 따름이다. 이 책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이미 언급하였듯, 이런 체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옭매는 사슬이다. 상류층이나 하층민이나 모두 왜곡된 인식을 획득한다. 또 이전에 마이클 샌델의 책을 소개하며 논의하였듯, 기회의 평등은 모순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저해시킨다. 이런 비판 역시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이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언제나 반X적인 사회로 전환될 수 있으며 실제로 실현된 역사가 있다. 이 미지수는 언제 '나'나 당신, 혹은 우리가 될 지 모른다.
하버드의 한 교수가 지적했듯 우리는 감시자본주의시대에 진입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플랫폼들의 등장은 문화산업의 부정적 효과를 강화시켰고 인류의 천박함을 가속화시켰다. 중독성은 강화되었고, 사람들의 소비도 더 가속화되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메커니즘은 우리가 특정한 제품을 계속 소비하도록 유도하며 우리는 특정한 그룹 안으로 밀어 넣는다. 티켓에 대한 강요는 더 심화되었으며 그 판매과정은 더 촘촘해진 것이다. 과거에 광고의 주체가 기업이었다면, 이제 SNS에서 활동하는 개개인도 알게 모르게 광고의 주체가 된다. 하버마스가 지적했듯 인간들의 파편화 역시 더 심화되었다. 21세기에 와서 주목된 ‘개인의 개성’ 역시 미리 제시된 티켓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며. 개인들 간의 파편화를 심화시킬 따름이다. 이러한 파편화는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회에 있어서 혁명, 더 나아가 연대의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정부 부처만이 아니다. 기업들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우리를 유도하고 통제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인간은 기계가 되고 공장의 일부다. 산업혁명 이후부터 이 불편한 진실은 결코 변한 적이 없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 특히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심각한 우울 상태에 빠진 채 철학적 사유를 진행했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온 그들은 자본주의의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아메리카드림으로 유명했던 미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착취당하는 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며 당연히 혁명의 동력 역시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에 우울을 상식을 돌파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그러한 돌파는 긍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뒤바꾸며 진행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다. 스피노자가 선언하고 헤겔이 이어받았듯이, 긍정은 곧 부정을 만든다. 이는 필연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긍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부정에 주목했으며, 그로 인해 소외되는 자-부정되는 자-들을 결코 져버려서는 안 됨을 지적한다. 그 결과 그들은 상식을 돌파한다. 그렇게 돌파하여 얻어낸 진실은, 자본주의 역시 거대한 부조리란 사실이다. 『계몽의 변증법』 어쩌면 일종의 훈련서적일지도 모른다. 그 훈련이란 비판적 사고능력에 대한 훈련이다. 이 비판적 사고의 결론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현재까지는 최후의 체제이지만, 최선의 체제는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