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다는 착각 , 자본-자유주의의 모순
『공정하다는 착각』,『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개인적으로 정치철학자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한 쪽은 공화제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 공화정은 민주주의 역시 포함된다. 하지만 모든 공화주의자들이 민주주의자였던 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될 경우 '여론'이 형성되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제를 지지했다. 이와 다르게 만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철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사실 공화제 -여기서의 공화제는 보통 소수의 인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를 일컫는다- 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는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공화정이든 민주주의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다수가 충분한 소양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지식, 도덕적 소양, 논리적이고 비판적 사고능력등이 포함된다.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이론적 기반이 된 철학자인 루소와 프롬 모두 교육의 문제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사회는 민주시민을 키우기 위해 적절한 교육을 시행하여야만 하며, 사람들은 -최소한 대다수는- 그런 민주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권력을 나눠가지고 있어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주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은 아주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반면 플라톤 등으로 대표되는 반공화주의자도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았다. 최소한 다수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죽임 당하는 걸 보고 대중들이 충분한 소양을 지니는 건 불가능함을 포착한다. 물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단지 냉소를 보내거나 귀를 닫고 외면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마이클 센델은 현대의 공화주의자다. 그는 덕윤리학자이자 의무론자기도 한데, -현대적 덕윤리의 시초인 엘리자베스 엔스콤은 본래 칸트주의자였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공공선을 함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서로가 서로를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러한 관계들을 토대로 하여야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2020년, 센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를 두 가지 영역에서 비판한다. 첫 번째로 영역은 능력주의가 어떻게 현현되어 있냐의 영역이다. 이에 대해선 필자가 이미 앞 장에서 논의를 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모순되어있다.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 유럽국가들보다 계층이동성이 떨어진다면 점에서 그렇다. 이후로 센델은 능력주의가 충분히 훌륭하게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정녕 도덕적이냐고 추궁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영역, 즉 능력주의 도덕적 영역이다. 우선 이 추궁이 대략 어떤 논지이냐 짚어보자.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이 곧 옳은 사람이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을 입증해주며, 능력이 곧 선이다. 그 반대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능력주의의 논리 하에서 그들은 모멸당해 마땅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누구나 할 수 있는 무가치한 일에 종사하며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누군가 -특히 기업가-들에게 빌붙어 사는 존재들로 취급 받는다. 왜냐하면, 기회는 공정하기 때문이다.
정녕 이런 사고방식은 옳은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성실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악인이란 의미는 더더욱 아니고. 그럼에도 능력주의는 그들을 업실 여겨 마땅한 존재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능력주의는 비도덕적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고 싶다. 자산관리사라고 명명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재산을 위탁 받는다. 그 돈을 다른 상품에 투자하여 고객의 재산을 불려주는 게 그들의 업무다. 자산관리사들은 그들이 증대시켜준 가치에 비례하여 수수료를 받는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자신의 돈을 잃지 않고 투자를 하는 셈이다. 자산관리사 중 몇몇은 이러한 방식으로 명품시계와 명품차를 타고 고층빌딩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생활한다.
물론 그들은 하루를 무척 열정적이고 바쁘게 살아갈 것이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자료를 찾아보고, 투자상품을 점검하는 데에는 몸이 두 개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청소부나 공장노동자, 영세한 요리사나 콜센터 직원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사회에 자본을 분배하는 일이다. 거대화된 사회에서 이는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다른 노동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으로 자원과 자본, 가치 따위를 직접 산출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일이다. 강하게 표현하자면 부자들이 빈자들에게 기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적으로도, 사회명망적인 차원에서도 생산자들보다 더 우월한 삶을 산다. 자, 능력주의가 정말 옳은가?
능력주의의 강화는 자본주의의 확장과 발을 맞추고 있다. 마이클 센델은 의무론자론자로써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 받는 상황을 거부한다. 동시에 덕윤리론자로써 사회구성원 모두 어느 정도의 공공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구성원 전원이 최소한의 도덕적 소양을 함양한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깨진 사회는 삐그덕거리고 결국에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실제로 타인들이 어떠한 선을 지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야 사회가 건전하게 작동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실제로 그래야만 한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사람들 간의 신뢰관계를 붕괴시킴에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세상의 모든 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범주화하면 시장의 영역에 속한 것과 그 영역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로 나눠져 있는 셈이다.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모든 것이 재화적 가치로 평가되어선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시장의 영역은 언제나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한다. 사실 이런 사례는 과거에도 존재해 왔다. 근대 영국의 미치광이들은 떠밀려온 난민들이 하루에 얼마나 죽냐로 내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현대에 자본주의가 점점 발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장의 탐욕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센델은 실제 그렇게 되어버린 비극적 사례들 역시 여럿 다루며 비판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동시에 기회만 공정하다면 시장을 자유롭게 두는 게 상책이라는 능력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센델은
만약 누군가가 콩팥 한 쪽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보자.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여기에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판매자가 자신의 의사를 따라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몇 가지 배경설정을 붙여보면 어떨까? 그 누군가가 부모 없이 동생들을 부양하고 있는 소녀라면? 그녀의 의사가 정말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을까? 그 결정은 사회적으로, 또 자본주의적으로 강요 받은 결정이다. 누군가 칼을 듣고 협박하는 것만이 강요가 아니다. 즉, 시장자유주의라는 체계는 시장 내에서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중시하지만, 정작 그 의사결정들이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샌델은 이를 ‘부패의 문제’라고 표현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사람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품위나 공공선, 인권 등의 가치를 약화시킨다는 요지다. 윗 문단의 ‘콩팥을 팔기로 한 소녀’는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결정에 대한 예이기도 하지만, 부패의 문제를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소녀에게 장기를 팔라고 종용하거나, 구매자와 연결해준 구매인. 적출을 진행해준 의사. 모두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보단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장기를 산 부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한 결정이라손 치더라도 말이다.
능력주의와 자유주의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넘어 끈적하게 엉겨붙어있어 서로 분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둘 다 부의 창출을 선이라고 가정하며 자기네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회는 공정하다고 믿으며,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낙인 찍고 업신여긴다. 하지만 모든 가치는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부입학이 통용되는 미국에서도 관련 증서에 누군가가 기부입학자라고 명시하진 않는다. 어떤 도덕적 행위는 금전적 보상 앞에선 약해진다. 헌혈자에게 돈을 주기 시작하자 역으로 헌혈자들이 줄어든 예는 우리에게 이미 유명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이 금전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왜곡되길 원하지 않는다.
전술했듯 민주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교양과 도덕적 소양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고 상대방의 품위 역시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한 신뢰관계가 없다면 사회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하지만 시장자유주의와 능력주의 모두 이러한 신뢰관계를 무너트린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돌파되어야 할 대상이다. 또 시장자유주의와 능력주의 모두 도덕이론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세상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가 더더욱 부패하고 천박해지기 전에 벗어나야만 한다. 능력주의와 시장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