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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un 10. 2024

우리는 난장이고 벌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변신」, 「운수 좋은 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단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연작집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품 중 하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무려 12개의 작품이 연속적으로 구성되어있다. 만약 단편 하나만 읽었다면 이제 고전이 돼버린 연작집의 맥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연작집의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작품 전체가 하나의 비유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서문의 역할을 하는 「뫼비우스의 띠」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단편 「클라인씨의 병」이다. 작품의 주된 소재는 제목의 그것과 상응한다. 둘은 소재는 다르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둘 모두 안과 바깥이 구별되지 않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중성은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일 뿐, 본질은 결국 하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가장 관심 깊게 다루고 있는 계층은 하층민이다. 하지만 하층민에 대한 묘사에만 집중하면 이 작품이 아우르는 바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 연작집은 하층민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상류층을 모두 다룬다. 실제로 하층민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어떤 역경을 살았는지 굳이 다시 적을 필요가 있을까? 달로 도피하기 위해 공장 굴뚝 위에서 달을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공을 쏘았던 난쟁이는 공장 굴뚝 위에서 추락사한다. 그는 한 명의 가장이었다. 그의 첫째 아들인 영수는 자신의 고용주라고 할 수도 있는 은강그룹의 회장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긴 한다. 그의 동생의 삶이 끝났을 뿐.


 연작집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는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는 영수가 은강그룹 회장의 아들을 살해한 이후의 이야기다. 서술자인 경훈은 피해자의 조카다. 이 일로 출국해있던 그의 친형들도 한국으로 돌아온다. 경훈은 그들을 보며 “비행기 속에서 나의 형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기들이 차지할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을 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또 그는 사랑으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재판장에서부터 그는 영수와 영수의 편에 선 사람들에 대한 매도와 힐난을 아끼지 않는다. 그에게 공장주들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 또 하층민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다. 반면 자신의 숙부를 죽인 자들은 아주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자들일 뿐이다. 경훈은 어떤 점에서 아주 비인간적이다. 또 그의 출생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중산층에 속해있고 대학 시절 사회운동을 하던 신애는 위기에 빠진 난쟁이를 구해준다. 그녀는 난장이에게 말한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작품의 주제의식이 참이라고 전제한다면, 등장인물 중 가장 현명한 자는 신애다. 그는 계층을 넘어 자신도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소외된 인간, 즉 난장이임을 알고 있다. 경훈도 난장이다. 그가 자본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인물인 건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출생에 의해 세상을 제대로 인식할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인간성을 잃었다. 사랑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또 형제들이 유산 생각이나 한다고 믿는 경훈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하다. 그는 앞으로도 사랑에 대해 평생 모를 것이다.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는 기계와 같다. 여기서 인간은 기계 작동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이 작동시킬 뿐이다. 중요한 건 ‘자리’가 찼냐 차지 않았냐. 공장주들도 결국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타나는 세계 인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또 클라인씨의 병처럼 피상적으로 대립되는 세계 뒤의 본질을 전제한다. 피상적인 세계는 상류층과 하층민의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결국 한 쪽에서 기원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결국 하층민이 기득권층을 칼로 찌르며 끝난다. 피해자는 그들을 이해할 의지가 없다. 아마 두 계층은 화해할 수 없을 터이다. 우리는 모두 난장이다. 키는 상관이 없고 빈부도 상관이 없다. 난장이를 난장이로 만든 것은 물리적 키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키도 원인이다.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를 난쟁이로 만들고 있다. 문제는 모두가 그걸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신」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는 설왕설래가 있다. 그가 정말로 벌레가 된 건지, 아니면 장애나 큰 병을 얻게 된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혹자는 그레고르가 정신질환이나 환상에 의해 스스로를 벌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논의는 중요한 건 아니다. 중점으로 두어야할 것은 그레고르는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겪는 부조리는 아주 다양하다. 한국의 독문학계에선 그가 여동생에게 근친애적 욕망을 품고 있다는 주장이 꽤 힘을 얻고 있다. 이는 그레고르가 누이동생에게 비정상적인 집착 -특히 옷을 입고 있냐 아니냐-을 근거로 한다. 이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떠나서- 수용해 본다면 그레고르는 가족제도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근친애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현대의 가족제도에서 근친애는 금기시 된다. 또 그레고르를 포함하여 소설의 등장인물 사이의 의사소통은 여러 번 실패한다. 즉 소통의 부조리를 겪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이 겪는 부조리는 세상이나 삶 그 자체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선 「변신」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부조리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볼까 싶다.


 그레고르가 직장이 얼마나 고단한 곳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가혹한 상사 밑에서 외판원으로 일하고 있다. 출장을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자주 나가야 했다. 한국에 사는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레고르는 외벌이로 가족 네 명을 부양하고 하인까지 부린다. 이가 그의 자부심이자 노동의 동기이다.  또 그는 누이동생을 음악학교로 보내고자 한다. 물론 동기가 있다고 자신의 업무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했고 액자를 만드는 취미가 있다. 헤겔은 노동을 자연을 제어하여 정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창의적이고 필수적 활동으로 보았다. 맑스 노동에 대한 견해는 헤겔의 것과 결을 같이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정반대가 된다. 본래 인간이 노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건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이 인간의 주체가 된다. 그레고르의 취미는 본래적 의미의 노동이라면 직업 활동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노동소외라고 볼 수 있다.


 이 노동소외는 자본주의의 문제다. 가진게 몸뚱아리뿐인 대다수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본가에게 자기 자신을 판매할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그들은 노동자가 되며 기계의 손발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


 중세 봉건제를 무너트린 자본주의는 어떠한 어떤 점에서는 보수적이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공고히 만들었다. 최소한 20세기까지는 그렇다. 실제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이 서독보다 더 성평등적이었던 실례도 존재한다. 자본주의하에서 가부장제는 어떻게 강화되는가? 남성은 강제적으로 가장이 되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앓는 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잃는 것을 넘어 남성,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잃게 된다. 실제로 그레고르가 실직이 장기화되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 냉담해진다. 살뜰히 그를 챙기던 누이는 손을 놓아버렸다. 또다시 가장을 인양 받은 잠자씨-그레고르의 친부다-는 그레고르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오해하고 사과를 던진다. 이는 그레고르의 사망에 직접적 원인이 된다. 실제로 소설 후반부에 그들은 그레고르가 죽길 바란다는 심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그레고르는 죽는다. 반면  그의 가족들은 이 일을 축하하며 교외로 나들이를 나선다. 그들은 무척 기뻐 보이고 미래도 무척 희망적으로 묘사된다. 가족의 죽음에 기뻐하는 모습은 꺼림직하지만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장면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물론 이는 그레고르가 죽어 생겨난 기쁨과 홀가분함의 표현이자 분출이다. 거대한 벌레, 골칫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몇몇 독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그레고르가 가정으로서의 권위를 악용해 오지 않았겠느냐고 주장한다. 적어도 소설 내에서 그런 모습을 보긴 어렵다. 「변신」이 3인칭소설이지만 시점이 그레고르에 흡착되어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떨지 모르는 일이긴 하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가부장제의 가장 가혹한 것은 가정이 탈권위적인 인물이라더라도 권위를 발산한다는 점이다. 물질이 신이 된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벌어오는 가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레고르도 이에 해당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변신」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카프카가 삶의 부조리한 측면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누구보다도 와닿고 충격적으로 표현해냈다. 그레고르가 겪는 일은 우리가 겪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의 상당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기원한다.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벌레가 된다.


 「운수 좋은 날」


  비가 쏟아지고 아픈 아내가 떠나지 말라고 애원해도 인력거꾼은 손님을 태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야만 월세를 내고 약을 사주고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줄 수 있다. 인력거꾼은 선술집으로 향했다. 웬일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다. 빈대떡 두 개에 추어탕 세 그릇, 구운 떡, 막걸리 수 잔을 시켜도 괜찮을 만큼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취한 인력거꾼은 돈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외친다. 이런 육시럴 놈의 돈!”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바닥에 자신이 던져놓은 돈을 급하게 줍기 시작한다. 돈은 참 좋다. 빈대떡 두 개에 추어탕 세 그릇, 구운 떡, 막걸리 수 잔을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울 수 있게 해주니까. 인력거꾼이 집으로 돌아가자 갓난쟁이는 이미 죽어버린 어미의 젖을 빨아댈 뿐이다. 그녀는 약을 지어 먹을 돈이 없었고, 인력거꾼은 아내의 임종을 지키기 위한 시간을 살 돈이 없었다. 아마 그 아기도 오래 살진 못하리라. 젖동냥으로 아기를 키워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그래, 육시럴 놈의 돈은 참 좋다. 우리를 난장이로도 벌레로도 만들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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