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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un 03.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있다.

『시지프 신화』


 죽을 이유는 수없이 많다. 때때로, 어쩌면 자주 나는 삶을 자주 포기하고 싶어진다. 수면제가 없으면 -가끔은 복용해도-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걸 상기할 때면 그렇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날씨가 좋다던가, 멍하니 밥을 먹다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가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을 누군가에게 설득할 생각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나한테 이런 것들은 모두 결정적인 이유지만 타인들이 볼 때는 무척 사소하리란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사례 하나하나가 모두 나한테는 죽어야 할 중대한 이유가 되어준다. 조금 더 순수했던 시절의 나는 베르테르처럼, 또 페르디난트처럼 격정적이었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권태로워졌다. 매 순간 끊임없이 그렇다. 앞으로도 내 삶은 평생 권태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순순히 죽을 생각도 없다. 발작이 불쑥 찾아오긴 하지만. 또 가끔 칼을 들고 멍하니 서 있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누구 좋으라고 죽는단 말인가? 그래 봤자 내 손해 아닌가?


 다수의 자살에 사회적 문제가 개입되어있다는 점에서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뒤르켐의 의견은 분명 일리 있다. 그의 『자살의 사회학적 연구』가 통계의 정확성이 의심되며 너무 임의적이지 않으냐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살률1위의 명예를 거머쥔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노인 자살률은 어째서 높은가? 물적∙정신적 차원에서 노인복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1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자살의 이유가 사회적이라면, 죽지 않은 이유 역시 사회적일 것이다. 자살 충동이란 걸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해 보고 이야기해 보자. 그들은 어째서 죽지 않을까? 그건 책임과 미련 때문이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가장이라면 쉽사리 죽을 수 없다. 책임질 것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삶에 미련이 남아 죽지 못한다. 가져보지 못한 차나 먹어보지 못한 음식, 여행, 짝사랑하는 누군가, 지금까지 이뤄놓았던 성과나 다음 주에 있는 최애 연예인의 콘서트 같은 거. 이렇듯 책임과 미련 모두 사회적이다. -카뮈의 관점에 따르면- 상기의 것들에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 사람은 죽게 된다. 그래,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필지가 죽지 않는 건 사회적 이유 때문은 아니다. 카뮈는 스스로 선포한다. 자살은 지금까지 사회적인 것으로 다뤄졌으나, 이 책에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시지프 신화』


  『이방인』과 『페스트』의 작가인 카뮈가 쓴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 이 책이 실존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는 건 너무나도 유명하다. 작가 본인은 자신을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부조리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큰 차이를 느끼긴 어렵다. 이 책의 서론에서 카뮈는 말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살에 대한 마지막 장에서 이 에세이를 다루는 일은 무척 적절한 일일 것이다.


  우선 부조리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보자. 부조리는 -누구나 알다시피-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카뮈는 '부조리한 감정'이 자살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이 부조리한 감정은 ‘나’와 ‘세상’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한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나’는 이성적인 존재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유를 찾고 무언가를 해명하려고 한다. 카뮈의 말에 따르면, 발견한 이유가 터무니없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무언가를 납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세상'은 비합리적이다. 우리가 세계를 통째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해를 초월한 낯선 세상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납득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촉발되는 감정이 바로 부조리한 감정인 것이다. 카뮈의 자살은 이 부조리한 감정의 결과이다. 낯선 세계에서 우리는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 이유란, 곧 삶의 이유와 직결된다. 우리가 흔히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돈, 가족, 사랑, 명예와 의무 따위-가 사실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으면 자살에 대한 욕구는 살을 에이 듯 다가온다.


 자살과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어느 정도 설명한 후, 카뮈는 책 말미에서 시지프의 비유를 꺼낸다.  시지프라는 인물은 신을 골탕 먹인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인물이다. 그 형벌이란 산 위로 돌을 굴리는 것인데, 이 돌은 산 정상에 서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즉, 시지프는 영원히 돌을 굴려야 하며 그 행동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들은 무의미한 노동을 영원히 지속하는 것만큼 큰 형벌도 없다고 생각했다. 카뮈는 삶이란 이런 돌 굴리기와 같다고 말한다. 삶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 또 무의미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무엇이든 깊이 파고들어 보면 의미는 붕괴된다. 즉 삶은 무의미하다. 이런 무의미 앞에서 시지프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지프가 벌을 받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신은 그에게 부조리를 형벌로써 내렸다. 시지프의 괴로움이 신들에겐 있어서 쾌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돌 굴리기를 즐기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돌 굴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면서 즐기기 시작한다면 신들은 아주 배알이 꼴릴 것이다. 이 저항이 바로 시지프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삶은 우리에게 부조리를 형벌로써 내렸다. 별 이유는 없다. 굳이 따지면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있다. 삶은 우리를 보며 깔깔거린다. 삶은 어떻게든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는 있다. 부조리 자체를 즐기며 순순히 죽어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세상의 부조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식은 오히려 작품의 출발점일 뿐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주제다. 카뮈는 자살의 원인을 부조리한 감정이라는 지극히 내밀한 무언가로 제시한다. 삶의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모든 죽음이 무의미함에 의한 죽음은 아니다. 카뮈의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편도행 전투기에 몸을 실었으며, 세일즈맨은  보험금을 위해 자살한다. 하지만 카뮈의 말에는 분명 시사점이 있다. 그는 나와 세상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필자는 죽음이 육체의 죽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가 바뀌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순수함의 죽음, 동심의 죽음, 양심의 죽음, 신념의 죽음, 희망의 죽음. 모두 똑같은 죽음이다. 삶은 어떻게든 우리를 죽이려고 하고.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사귈 정도로 다정하지 않다. 세상과 타인을 믿을 정도로 순수하지도 않다. 다른 사람 험담하는 게 취미일 정도로 심성도 뒤틀렸고. 그리고 언젠가 분명 나의 육신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내일도 아닐 것이다. 흘러간 것은 그냥 보내주리라. 나는 엿을 먹여줄 것이다. 삶에게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다. 나는 부조리조차 즐겨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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