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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May 20. 2024

자살의 첫 번째 이유, 권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필자에게 이 책과 얽힌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와 만날 일이 있었다. 상대방은 차가 막혀 20,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다. 그래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마침 가지고 있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을 꺼내 읽었다. 그 사람은 정말 30분 후에 딱 도착했다. 그리고 내게 농을 쳤다.


 “그 책을 밖에서 읽고 계시니까 진짜 위험해보여요.”

 좋은 농담이어서 나도 웃었다.




 소설은 타인의 자살을 도움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인물-작중에서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나' 일컬어진다.-의 글과 독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글이란 고객들의 삶을 기록한 일종의 소설이다. 끝내야할 때 끝내지 못하는 생은 얼마나 너절하고 뻔뻔한가? 반대로 끝내야할 때를 아는 자는 아름답다.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자살을 돕고 글을 쓴다. 그는 의뢰인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일그러진 직업의식을 가졌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여성은 셋이다. 유디트와 에비앙, 미미. 여기서 자살을 하는 여성은 유디트와 미미다. 소설의 전반부에는 특히 유디트, 후반부에서 미미라는 인물이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에비앙은 중간에 껴있는데 자살은 하지 않는다. 꽤 서운하겠지만 그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유디트, 본명은 세연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가 유디트라고 명명한다. 그녀가 유디트를 닮았고, 그 만큼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적쾌락을 즐기며 퇴락적인 삶을 산다. 어떤 측면에서는 즐긴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은 듯도 하다. 그녀에게 있어선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주문진으로 가던 중 그녀와 C가 타던 차는 폭설에 파묻혀버린다. 그 지루한 순간, 유디트는 한 차례 자위를 한 후 말한다.  “후, 멀리 다녀왔는데도 바뀐 게 없어.” 자살을 하기 전 그녀는 K와 C라는 두 형제와 엮인다. 본래 그녀는 K와 연인관계였다. 하지만 유디트는 C가 자기의 유혹에 언제 넘어올지 스스로 내기를 건다. 내기의 성패에 따라 본인이 누구와 함께 살지 결정된다. 내기에 성공하고 유디트는 크게 웃는다. C는 금방 자신에게 넘어왔고, 내기에 따라 유디트는 그와 함께 살기로 한다. 그녀는 북극을 떠나고 싶어한다. 결국 도착한 곳은 폭설에 묻힌 주문진이었지만......,


 그녀와 몸을 섞었던 K는 택시기사다. 일하는 틈틈이 동업자들과 셧다를 친다. 새벽, 고속도로에서 운행을 할 때에는 엔진이 분당 5000번 회전할 정도로 속도를 즐긴다. 심지어 손님을 태우고. 속도와 셧다는 스릴이고, 섹스는 육욕이다. 권태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스릴과 육욕에 빠지곤 한다. 무료하디 무료하고, 지루하디 지루한 삶에서 조금의 파장이라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격한 일을 자극이 필요하다. 우울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그리고 서로를 부추긴다. K가 화투를 치는 순간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판돈이 가장 커지고 노름꾼들이 망설이는 이때, 일상의 권태와 나른함이 휘발해버린다……, 고스톱은 너무 느리다.” 권태로운 자에게 너무 느린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건 삶을 견디게 해주지 못한다.


  인생이 권태로운 것은 K의 형인 C도 마찬가지다. 유디트와의 담화 이후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인생이란 건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눈이 쌓여가는 차 속에서 유디트와 C는 몸을 섞는다. C가 사정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의 목을 졸라달라고 부탁한다. C는 그녀가 컥컥거리자 흥분을 해 사정을 하지만 동시에 목은 놓아버린다. 유디트는 불만을 토로한다. 너는 아무도 죽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C나 K나 마찬가지라고. 유디트는 죽음을 바란다. 또 자신을 죽여줄 만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녀는 남을 죽여주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남을 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북극에 가고 싶다는 유디트에게 C는 말한다. 북극은 없어, 얼음덩이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뿐이니까 아무도 그곳을 찾지 못하고 너도 그럴거야.


 유디트는 자살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C다.

 

 유디트의 이야기가 대략 마무리된 후 소설은 3장을 횡단하여 유미미의 이야기로 향한다. 유미미는 행위예술가로 자신의 몸을 붓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러다 덜컥 비디오아트를 하는 C와 합작을 해보기로 한다. 어떤 합작이냐? 유미미의 퍼포먼스를 C가 촬영하고 편집하여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둘을 주선해준 큐레이터는 놀라워한다. 본래 그녀는 남과 협업을 하지도 않았고, 어떤 매체에 자신을 기록하지도 않았다. 둘을 주선해준 큐레이터는 이에 놀라워한다. 놀라긴 C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유는 달랐다. c가 생각하길 그녀가 자신과 몸을 섞었던 유디트와 닮았다.


 미미는 자신이 촬영되는 것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시간과 함께 휘발되고 마는 행위예술을 해온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집에 널려있는 조화들을 보고 기겁한다. 조화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시들지 않으니까. C와 '나'는 동일선상에 서있다. '나'는 조화를 키우고 자신이 죽은 이들을 소설로 남긴다. C는 자신이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을 영상을 통해 포획한다. 둘은 본질적으로 동류다. C는 자신의 취미가 나비를 박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아름다운 것을 포획하는 일이 즐거웠다고. C에 대한 암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유디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누군가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둘은 결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는다. 미미는 자살을 결심하고 ‘나’에게 돌아와 C가 자신의 구원이 되지 못했노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역시 구원자에 속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구원이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일까? 글쎄, 확실한 건 미미 역시 따뜻한 욕조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미미가 죽기 전, c는 그녀와  독대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촬영을 허가했는지 고백한다. 본래 자살을 할 요량이었으나 실패하자 자살조력자가 지금까지 거부했던 일을 해보라며 c에 대해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자살조력자는 미미가 자살에 대한 확신을 가지길 바랐을 테다. 이후 욕조의 거울을 보니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고 한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와 작업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영상이 되어 시간을 초월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포획됨으로 성립된 초월이다.


  “왜 영상을 지워달라고 한 거야?” C가 묻는다.

 “글쎄, 영원히 나를 복제할 수 있는 것 속에 담겼다는 게 두려웠다고 할까? 그리고 그게 다른 사람의 아닌 네 수중에 있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어.” 미미는 대답한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C의 수중에 사로잡힌 후이고, 자살조력자의 수중에 빠져있기도 하다.


  K는 C의 전시회장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숨겨놨던 과거와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어릴 때 집에서 놨던 화재가 형의 수집품-나비-들을 태우다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K의 기억 속에서 그의 형은 자신의 안위보다 나비를 먼저 걱정했다. 그런 형을 보며 K는 두렵기도 했지만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빼앗기는게 익숙하다고 말한다. 형은 유디트도 빼앗아가지 않았는가?


 “신경쓰지마. 어차피 죽은 나비들인데.” C는 쿨하게 대답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유미미의 영상을 수 없이 돌려보았다. 화면 속 영상은 미미이자 유디트다. 유디트든 미미이든, 죽었든 살아있든 “신경쓰지마. 어차피 죽은 나비들인데.”


 자살조력자는 건수를 하나 끝내면 훌쩍 여행을 떠난다. 고객을 찾을 때는 이렇게 묻는다. “멀리 떠나도 변하는게 없죠?”그는 조화 무더기 속에서 인생의 무료함을 느낀다. 그리고 뇌까린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게 없을까? 인생이란.


 아마 ‘나’는 죽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살을 택할 정도는 아니다. 권태에 빠진 사람은 연초나 술, 연애나 섹스에 중독되곤 한다. 때론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들이 가져다준 쾌락이 잠시 높이 뛰었다가 사라지면 남는 것이라곤 자신의 삶이 권태롭다는 재확인 뿐이다. 이런 식으로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마치 깊은 못에 돌맹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 수면에 잠시 파동이 생기지면 이내 잠잠해진다. 진정한 권태란, 앞으로도 자신이 권태로울 것이란 확신을 통해 완성된다.


 그의 작업은 자신처럼 권태로운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자신이 이입할 수 있는 자들이 상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행위는 자해나 자살과 같다. 자신이 투영되는 사람을 선택하여 파괴하고 글을 써서 미화시킨다. 이건 일종의 박제이고 C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려는 듯도 보인다. 그 작업이 사라진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평생 뿐이다. 저런 일을 저지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의 삶은 권태롭다. '나'가 떠나는 여행은 아마 변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욕구의 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권태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C는 물론이거니와, 주문진으로 떠났던 유디트도, 처음으로 협업이란 걸 해본 유미미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렇듯『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대인의 박제욕구

 

 권태는 도시민들과 현대인들의 문제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부정적 징후들을 지적한다. 주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이고, 나머지는 대상의 존재 자체를 수용하고 긍정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와 자아라는 개념이 확장되고 강성해지면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가치관이 정립된다. 자본주의는 그 무엇보다 소유를 중시하는 경제 체계다. 자아는 언제나 타자를 전제한다. 타자는 자신을 위한 객체일 따름이다.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에 따르면 현대인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권태를 해소하고자 한다. 인간은 누구나 권태로운데, 이를 해소할 방법은 무엇인가와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 것 뿐이다. 소유는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권태를 해소하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C와 '나' -비록 과장되었을지언정- 현대인의 전형이다. 유디트와 미미가 권태를 느끼는 까닭은 자신들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타인을 죽이고 싶어한다. 이는 생명의 정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다만 이는 표현의 문제일 뿐이다. 자신이 아닌 주체를 자신을 위한 객체로 만드려는 욕구가 만인에게 팽배해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둘은 죽어야만 한다.


 C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있는 미미를 밤새 되돌려본다. '나'는 둘을 죽음으로 몰고서는 소설로 재구성한다. 이런 방식은 어쩌면 소유보단 박제라고 평하는게 적절한 듯도 보인다. 박제 역시 소유의 한 방식이다. 이 방식은 초월적이다. 대상이 죽었든 살아있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상을 재창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은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의 권태를 해소한다. 하지만 대상을 소유하고 박제하는 방식은 일시적이다. 권태는 잠시간 휘발되는 듯 보이지만 이내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더욱 심화된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실존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죽은 인간, 객체가 되어버린 인간과의 관계를 일시적이고 기만적일 따름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서 박제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 역시도 '나', 그리고 C와 동류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 많은 '나'와 C에게 둘러쌓여있는 존재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유디트이고 미미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모두 상호 소유의 굴레에 갇혀있다. C와 '나'가 현대인의 전형이 듯, 유디트와 미미 역시도 현대인의 전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권태롭다. 걔 중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도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멀리 떠나도 변하는 게 없다는 말은 여러 번 반복된다. 우리는 살아서 어디로 가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독백한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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