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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Apr 29. 2024

우울을 향유하라

『파리의 우울』,『말테의 수기』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음


 우울은 특권이다.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우울이 틈입하는 것을 도저히 견디질 못한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울한 사람들이 타인의 공감을 살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우울은 더 가치있어진다.


 필자의 태도는 분명 모순되어 있다. 우울을 괴롭다는 듯 묘사하면서도 환영할 만하다고 말하는 처지이니. 우울하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혜택도 있다. 그것을 누리는 부류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그런 혜택을 누리지 않았는가?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는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헤르만 헤세는 융에게 심리치료를 받았다. 반 고흐 역시 우울한 내면을 토대로 환상적인 자화상을 그렸다. 당대에 그들의 시선은 괴악하게 취급되었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했으니까. 하지만 개인에게 세상이란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서로 다른 세상에 살아가는 셈이다.


 우울은 이렇게 상식을 돌파하는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성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했다. 또 어떤 이들에겐 우울은 아름다움으로 현현했다. 시인들은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표현하는 자들이다. 그들 중 우수에 찬 몇몇은 우울을 탐미적으로 탐색했다. 오늘 이야기할 『파리의 우울』과 『말테의 수기』는 그러한 작가들이 당시의 파리를 소재로 한 책들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두 화자가 모두 우수에 빠져있다는 점. 또 빛의 도시인 파리에서 그림자를 뮤즈로 삼았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댄디라는 공통된 수식어로 묶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말테의 수기』에서는 『파리의 우울』에 실린 문구와 작품이 언급되기도 한다. 파리는 밝고 화려한 도시의 대명사다. 대부분은 파리의 어둠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시인은 다르다. 어둠을 향한 그들의 관심은 지독하다.


 『파리의 우울』


 댄디라는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불어로 멋쟁이란 뜻이다. 우리는 보통 옷을 잘 빼입은 사람에게 댄디라고 칭찬해 주곤 한다. 문학에서도 댄디는 멋쟁이라고 쓰인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는 용례보단 까다롭고 난해하며 복잡하다. 우울하지만 도시적이고 세련되었으며 탐미적인 문인들에게 붙는 호칭이 댄디인 것이다. 이러한 용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등장한 이래로부터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은 위의 술어들에 정말 딱 맞아떨어진다. 현대에도 댄디란 보들레르적이라는 의미와 진배없다.


 하지만 위의 술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댄디의 핵심은 "부정을 긍정으로 긍정을 부정으로 보는 것"이다. 책의 두 번째 시인  「노파의 절망」을 소개한다.


 "쭈글쭈글한 노파는 누구나 좋아하고 환심을 사려 하는 이 귀여운 어린애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노파처럼 그렇게 연약하고, 그녀처럼 이도 머리털도 없는 이 귀여운 것을.


 그래서 노파는 아이에게 다가가 웃어 주며 좋은 얼굴 표정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 늙어 빠진 착한 여인이 어루만져 주는 데 겁이 나 발버둥 치며 집 안을 떠들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착한 노파는 다시 그녀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우리 불행한 노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것들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어린 것들은 무서워하는 구나!'"


 보들레르가 대중들을 경멸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대중들에는 빈부도 가리지 않고 포함되었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았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 그는 노파를 경멸적인 어투로 묘사한다, 동시에 어린아이들의 잔인성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화자의 시선에 오직 경멸과 혐오만이 담겨있는가?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노파를 바라보는 시선엔 연민이 서려 있다.


 화자가 연민을 표현하는 순간은 노파가 고독 속으로 물러날 때이다. 이는 화자 역시 영원한 고독 속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즉 상대방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느끼는 연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민에는 경멸도 공존할 수 있다. 스스로를 경멸스러운 존재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들레르의 것은 칸트적이라기보단 쇼펜하우어적이다. 또 이런 태도는 분명 모순적이다. 하지만 긍정과 부정을 뒤바꾸기 위해선 꼭 전제되어야 한다. 모순이란 논리적 차원에선 존재하지 않을 수 있어도 실제로는 존재한다.


 보들레르의 모순적 면모는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약자들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뮤즈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그만큼 대중친화적인 작가도 드물다. 그는 모두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파리의 빛으로부터 고의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가 선택한 곳은 남들은 꺼리는 파리의 토사물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나는 산에 올랐다.

 그곳에선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원도, 창가도, 연옥도, 지옥도, 도형장도.


 그곳에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오, 내 고뇌의 수호자 사탄이여, 그대는 안다,

 내가 거기서 헛된 눈물이나 흘리러 간 게 아니란 걸.


 그보다는 늙은 창녀에 취한 늙은 호색한처럼,

 그 지독한 매력이 나를 끊임없이 젊게 해주는

 이 거대한 갈보에 취하고 싶다.


 그대가 감기에 걸려, 아직 무겁고 우울하게

 아침 잠자리 속에 있건, 또는 섬세한 금줄 장식의

 저녁의 장막 속에서 으스대고 있건,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수도여!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내게 그처럼 자주 가져다준다,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


 위의 시는 『파리의 우울』의 「에필로그」다. 화자가 이야기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더러운 수도를 사랑한다. 갖가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말테의 수기』

 

 몰락 귀족이자 시인은 말테는 파리를 거닌다. 파리의 골목길에선 사방에서 냄새가 난다. "요오드 프롬, 프렌치프라이, 그리고 불안의 냄새가 있다. 모든 도시는 여름의 냄새가 난다." 거기서 그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내면을 관찰하는 방법. 이 방법은 하나의 시선으로 나타나는데 참으로 댄디하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그는 병원과 조산원을 본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여기로 오겠지만, 나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는 죽어간다고." 병원과 조산원은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말테에게 그곳들은 죽음을 규격화시키는 공장과도 같이 나타난다. 즉 생명과 정반대되는 죽음을 포착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가족들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독백한다. 사람들에겐 각자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있는 것 같다고.


 그는 깡통을 보며 말 없는 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깡통을 보며 그것을 괴롭히고 소음을 낼 생각만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은둔자가 있다. 그들은 깡통을 괴롭히듯 고독한 자들을 괴롭힌다. 그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증오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힘의 마지막 수단은 명성을 주는 일이다. 명예와 괴롭힘이라는 두 모순은 이렇게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말테는 공포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가 깨달은 바는, 공포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내면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즉 공포에 대한 인식은 내면에 대한 인식이다, 말테가 배우고 있는 보는 법은 결국 내면에 대한 성찰이다. 내면을 성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울해진다고 얘기했다. 성찰하기에 우울해지는지, 아니면 우울하기에 내면을 들여다보는지는 여러 견해 차이가 존재할 터이지만,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댄디는 사회 부적응자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이런 시선을 견지하여야 한다. 우울에는 힘이 있다. 모순을 포착하는 힘이 있고, 긍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인류의 역사란 본래의 상식을 돌파하며 이루어졌다. 때론 우울한 시선이 그 누구의 것보다 진실에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필자도 말테처럼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울이 싫었다. 지금도 이따금이면 싫다. 우울해하는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우울이 싫다. 이젠 그 정도는 아니다. 여러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숙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시간이지나서 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호르몬의 균형이 맞춰진 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글쎄, 아마 이 이유들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이전보다 더 괴팍해졌고, 어떤 면에선 더 폐쇄적이 되었다. 무엇보다 저러한 이유들은 시시하다. 확실한 것은 『파리의 우울』, 『말테의 수기』을 읽고 나는 우울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알람이 울려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하기 전,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놓여진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다.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위의 온수로 팔을 뻗었다. 아래팔이 따끔했다. 시야를 내리자 새벽에 냈던 상처가 보였다. 아......, 그 순간 뇌는 기억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 일단 새벽이었고, 하늘엔 녘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잠들기 위해 먹은 약의 기운에 아직 취해있었다. 비몽사몽   비척비척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장을 열었다. 거기엔 커터칼이 들어있다. 조금 따끔하고 쓰리면 송골히 피가 맺힌다. 기억난다. 스탠드에 비친 피는 석류와 같은 광택을 내었다. 허여멀건한 석류나무 밑으로 열매가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는 퍼억하고 터지며 주위로 퍼졌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류가 흐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석류를 먹어 저승에 묶이고 말았다. 아마 나는 평생 우울할 것이다. 신경계는 이미 손쓸 도리 없이 망가져 시간이 지난다고 원상복구되진 않는다. 보들레르가 말했다.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없이 취해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어쨌든 취해라" 나는 지금 우울에 취해있다. 그렇게 우울이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가치는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른다. 인간도 이를 피해갈 순 없다. 슬픈 사실이다. 남과 같다는  대체될  있다는 의미다. 대체될  있다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남과 같을 바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그러니 나는 우울해야 한다.

 

 내가 자폐적인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많은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우울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남과 다를  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가라앉고 싶다.

 심해 속의 생각들 



인용의 출저는 민음사 판 『파리의 우울』과 문학동네판 『말테의 수기』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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