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욕은 사랑이 아니다.
마지막 사랑이야기, 개인적인 견해들
『투데이 위 리브』,『자기 앞의 생』,『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우리는 사랑은 삶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고독했던 인물인 마티아스와 르네는 서로를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 성장한다. 우리의 귀여운 모모는 누구보다 로자 아줌마를 잃었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를 짓고 지상으로 떨어진 미카엘은 인간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배웠다. 그들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쉽사리 깨닫지 못한다는 진리말이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은 사랑은 자유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자유는 항상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들은 고생도 꽤 하며, 심리적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끝까지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며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과거 두 작품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랑에 대한 프롬에 견해는 위의 작품들이 가진 주제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제창한 사랑에는 개념적으로 위의 것들이 포괄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단절에 대한 실존적 불안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여러 방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한 관계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이 하나고, 존재 자체를 그대로 포용하는 방식이 있다. 우리가 많이 착각하지만, 전자는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후자의 방식 뿐이다. 이 방식은 또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해결할 유일한 방안은 사랑뿐이다. 이렇듯 프롬의 사랑은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단절에 대한 불안을 장기적으로, 건전하게 해소하기 위해서는 소유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유다.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대상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자여야만 한다.
이제 개인적 견해를 밝히고 싶다. 물론 필자는 사랑에 있어서는 프롬주의자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괜히 말하기 입만 아프다. 사랑은 자유라는 것에도 절절히 공감했다. 어쩔 수 없이 뒤에 나올 말의 대부분은 재설일테다. 그래도 나름 색다른 면도 있을 것이다.
인식이란 대상을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야겠다. 인간은 인식능력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다. 관계란 기본적으로 삼자대면이다. 인식하는 주체인 '나'가 있다. 또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다. 그 사이에 '나'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대상이 있다. 우리는 자연히 대상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풋사과를 보고 익으면 붉어질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이러한 기대와 실제가 어긋나게 되면 충격에 빠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은 무생물이라 아니라 사람에게 적용될 때보다 두드러진다. 상대방이 나의 상상이나 기대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흔히 실망하곤 한다. 때때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이러한 전제에서 소유욕은 어떤 감정인가? 소유욕은 사랑이 아니다. 소유욕의 본질은 이기심이다. 이 주장은 단순히 "사랑은 자유다."라는 명제에 반작용으로 도출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나'가 기대하는 대상에 '나'의 힘이 투영되어있다면, 혹은 구성요소 중에 포함되어있다면 그건 결단코 상대방을 온전히 좋아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타인을 대상으로 소유욕을 가지는 부류는 이기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분노도 대부분 비슷한 맥락에서 발생한다. 분노란 상대방을 통제하고자 해서 생기는 감정이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은 자기자신은 그대로 보존하려는 채 상대방만의 변화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의 분노가 정당한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랑할 만한 이유보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 즉 본인의 자유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었다고 볼 여지가 없다. 그러한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자유의지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증명보다 중요한 건 실행이다. 이 실행이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심을 가진 채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다. 즉 이것은 소유의 굴레에서 벗어나냐의 문제다. 그러한 탈피에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터이다. 첫 번째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바로 표상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더 쉽게 풀어쓰자면, 내가 생각하는 대상과 관계맺는 다는 간접적인 방법에서 탈피하여 직접적인 방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상과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게 문제이니, 직접적으로 접촉해 보자는 이야기다. 이는 분명 노력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운이 좋은 극소수일 터. 인간에겐 어쩔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나더라도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프롬이 원하는 바였을지도 모른다. 저런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내심과 넓은 아량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또 성격구조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프롬이 정의한 사랑과 거의 부합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다 털어놓았다. 최소한 이 분야에 있어서 필자는 이제 빈털터리다. 사실 빈털터리라고 할 것도 없다. 가지고 있던 것이라곤 "사랑은 자유다." 라는 명제뿐이었으니까.
*사진은 그냥 귀여워서 올렸다. 비어있으니 심심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