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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May 13. 2024

세 경계인 이야기

「인간 실격」,「토니오 크뢰거」


 이 글은 부끄러운 고백이며 성찰이기도 하다. 


 요조라는 인물. 동정받을 자격이 있으면서도 혐오 받아 마땅한 인간.  「인간 실격」은 거울이 아니다. 밧줄, 사다리, 잠수정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인간의 심연 속에 이름 붙여줄 뿐이다. 요조라는 이름을.


  「토니오 크뢰거」를 처음으로 읽었던 순간은 생생하다. 문학을 읽으며 그렇게 설레였던 적은 없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와 나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종이에 인쇄된 그는 날 벅차오르게 했고 위로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정신적 성숙을 거치며 자기 긍정을 향해 나아간다. 어떻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가? 나는 질투심 때문에 책장을 닫았다. 


 나는 두 인물에게서 나를 본다.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정신병자. 필자는 경계인이다. 경계인이랑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뜻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정신병자라는 의미기도 하다. 통계상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면 다른 정신질환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필자 역시 그 근거 중 하나다. 이는 요조와 토니오도 마찬가지일 성싶다. 다만 이 글에서는 경계선 인격장애에 초점을 맞춰볼 계획이다.


 이번에 이야기해 볼 책은 「인간 실격」과 「토니오 크뢰거」이다. 두 작품 모두 중편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공통점이 이것만은 아니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둘 다 경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경계선 인격장애가 무엇인지 간단히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경계선 인격장애는 여러 번역어가 있는데, 영어로는 borderline personality이다. 심리 의학에서 인격이란 성격과 동일어다. 보통 대상에게서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자극에 대한 대처 양상이나 심리적 특징 정도로 번역된다. 인격장애는 이런 요소들이 지나치게 역기능적이라 사회적응에 문제를 초래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경계선 인격장애는 감정이 변덕스럽고 극적이며, 이에 의해 심각한 양가감정을 느끼며 자아가 분열된다. 앞의 두 증상이 기실 이 병의 핵심이다. 이로 인해 우울감이나 불안감, 자아감의 상실, 여러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 또 경계선 인격장애는 가장 위험한 인격장애로도 분류된다. 환자에게도 그렇고, 주변인들에게도 그렇다.



 「인간 실격」

 

 모든 소설은 주인공이 중요하긴 하지만, 「인간 실격」은 유난히 그런 편이기도 하다. 또 호불호가 심한 작풍 중 하나인데, 이는 주인공인 요조에 대한 독자의 감상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뉜다. 그 감상은 무척 극과 극이다. 요조라는 인물 자체가 자아가 분열된, 즉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인 영향도 있다. 요조는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만 오래지 않아 회피하고 도망치는 일련의 행동을 반복한다. 이 둘 모두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인데 후자는 회피성 인격장애와의 접점이기도 하다. 그는 어릴 때 하인들에게 겁탈당하며 반항다운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연민 받아 마땅한 인간임과 동시에 강간당하는 아내를 보고 도망치는 비굴한 인간이기도 하다. 


 요조는 여자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갈구한다. 요조는 한 여자와 동거를 하다가 갑자기 떠나기도 한다. 또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모두 경계선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행동이다. 경계인이 주변인에게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갑자기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고, 자해 등을 하며 관계를 이어 나가도록 협박하기도 하며, 자살 시도도 잦다. 이들은 남들의 행동에 무척 과민하게 반응한다. 상대방의 별것 아닌 행동을 이별의 징조, 자신에 대한 분노나 미움의 표현으로 생각한다. 경계인들의 급작스럽고 괴기한 행동들은 보통 이러한 인지도식에서 기원한다. 


 요조는 타고나길 사회에 융화될 수 없는 부류긴 했다. 그는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생명체라면 응당 느껴야 할 본능임에도 말이다. 또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위선,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요조는 이를 평생 납득하지 못한다. 이후 요조는 세 여인을 만난다. 그는 많은 경계인이 그렇듯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 동반자살을 시도하며, 갑작스럽게 관계를 단절하고 도망친다. 마지막에 요조는 요시코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그녀는 한 남자에게 겁탈당하고 요조는 그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는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는다. 대신 옥상으로 도망치며 절규한다. 요시코는 너무나도 순수하였기에 겁탈당했다고, 적어도 요조는 생각한다. 인간 사회의 위선을 이해하지 못하던 요조는 인간 사회에선 순수함조차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약에 빠지고 폐인이 되어 스스로에게 선언한다. "인간 실격"


 이 선언은 스스로가 폐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포한 것이다. 이는 사실이지만 피상적이다. 그는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스스로 광대라는 가면을 쓰면서도, 대학생이 되어서는 공산주의자인 또래들의 심부름꾼이 되면서까지, 두 여인을 스쳐 지나가면서 온갖 심리적 격정을 겪고 나서도 요시코와 결합하고자 한다. ‘순전함’이라는 미덕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이후 그는숲 속의 병원에 갇힌다. 요시코는 마지막으로 그가 사용하던 약물들을 건넨다. 요조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받았을 때 거절한 최초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지 않는다. 저 거절은 이러한 심경의 물적 표현이다. 그가 끝내 선택한 것은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라는 패배주의적 선언이며 회피였다. 작품의 끝에서 마담은 요조가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글쎄, 비겁함이 악이 아니라면 그렇다. "인간 실격"이라는 선언은 타인과의 공존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회적이라기보단 사회적이어야만 하는 동물이다. 요조는 이 필연적 의무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 실격일 수밖에. 


 어떤 사람들은 요조를 향한 깊은 연민을 느낀다. 반면 그를 인생에서 절대 만나선 안되는 부류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공감 가는 의견이다. 작품 초중반부에서 필자 역시 요조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가 겪는 장애와 고통이 오롯 그의 책임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니까.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필자 역시 그를 혐오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닌 부덕은 필자가 지녔던 연민만큼이나 컸다. 하지만 그 연민도 경멸과 혐오도 모두 필자가 그에게 공감하기에 발생한 감정이다. 공감이란 간주관적인 인식이다. 최소한 비슷한 경험을 선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순히 나와 요조가 같은 질환을 앓는 환자라 그런 것이 아니다. 나도 그처럼 비굴하고 비겁한 인간이다. 그가 타인과의 갈등을 두려워하고 깊은 관계를 매는 것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듯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다. 이것은 나의 죄다. 그것은 확신에 찬 자기 예언, 어떻게 하든 미래에는 갈등이 생길 것이고 상처를 받은 채 관계가 끝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란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다. 여기서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처를 얻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극복하면 그만인 일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함, 그것이 나의 죄다. 


 요조의 추한 몰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추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나이기 때문이다. 때론 스스로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요조가 싫다. 나는 나의 심연에 요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선언한다. "인간 실격"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라는 이름부터 분해해 볼 필요가 있다. 크뢰거는 전형적인 독일북부인의 성이다. 토니오는 독일의 기준에선 꽤 이국적인 이름이다. 그의 선친은 딱딱하고 과묵한 전형적인 북부독일인인 반면, 어머니는 예술가적 소질과 소양을 지닌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남부인이다. 이 둘은 각각 시민세계와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또 작품에서는 둘의 양육태도가 확연히 달랐음이 묘사된다. 이는 경계선 인격장애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례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토니오 크뢰거의 세계는 둘로 분열되던 셈이다. 


 그의 불우한 가정환경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가장 크뢰거는 불미스럽게 사망했고 그의 부인인 콘수엘로는 상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났다. 토니오 크뢰거는 양육자에 대한 상실을 어린 나이에, 또 단기간에 두 번이나 경험한다. 이는 정신적 외상을 입기 충분한 상황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시인으로 성장한다. 그의 여자 친구는 화가다. 이 대목에서 그가 분명 예술을 사랑한다고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문학은 소명이라기보단 저주라고 외친다. 예술에 대한 그의 마음은 이중적, 즉 분열되어 있다. 「토니오 크뢰거」에서는 예술가들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즉 시민사회의 대비가 나타난다. 시민사회에 대한 주인공의 마음은 어떤가? 역시 분열되어 있다. 그는 시민들의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과 명랑성 따위를 동경한다. 또 스스로 역시도 그런 삶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다. 하지만 그들이 욕구와 본능만이 존재하는 속물적인 존재라고도 느낀다. 또 그는 예술가의 삶이 건강하고 정상적이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최소한 그에게 있어서 예술세계는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다. 즉 토니오 크뢰거는 시민적 삶을 저속하다고 여기면서도 동경한다. 또 예술을 저주라고 하면서도 사랑한다. 그는 방황하고 있다. 이는 숙명이다. 


 그는 에술세계와 시민세계 모두에 극단적인 감상을 가지며 사이를 왕복한다. 이런 고통 속에서 작품의 결말은 일종의 화해로 나타난다. 토니오 크뢰거는 이러한 자신의 모순됨을 긍정하며 끝이 난다. 이는 결국 삶에 대한 긍정이며 미래를 향한 전진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인정하는 일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 실격」은 내면적이고 자기패배적인 작품이다. 단순히 주인공이 파멸하는 결말을 맞아 그런 건 아니다. 요조는 자신의 끔찍한 내면으로 끊임없이 침전해 들어간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절감한다. “인간 실격”이라는 선언은 그러한 행보의 말로다.  


「토니오 크뢰거」 역시 우수에 찬 소설이지만 「인간 실격」과 방향성이 사뭇 다르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지만 자가폐쇄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애시당초 외부의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을 지니고 있다. 비록 그들에 대한 경멸심을 동시에 가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여행길을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게 된다. 이 인정은 요조의 것과는 썩 다르다. 그는 자신의 모순된 내면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알을 깨고 나와 스스로를 긍정하고 극복해 보겠다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외면적이고 자기극복적이다.


 필자와 같은 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토니오 크뢰거가 되는 것뿐이다. 요조라는 인간상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맞이하겠다는 선언일 따름이다. 이는 결국 삶에 대한 패배다.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굴복시키려고 한다.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작품을 쓴 오사무 역시 독자가 그런 선택을 하길 바라진 않았을 터이기도 하고. 본래 스스로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 모순이 자기혐오와 연관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필자 역시 내면의 모순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비동일성은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이를 계기로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해야만 한다.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어쩌다 보니 병에 걸려있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더 생각해 봤자 이로울 건 없지만 계속 골 속에서 메아리친다. 참,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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