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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Apr 15. 2024

왜 사랑해야 하는가?

『자유로부터의 도피』,『사랑의 기술』,『소유냐 존재냐』

 앞서 이야기한 다섯 소설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또 필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감동적이고 재밌으면서도 사랑의 속성을 훌륭히 묘사해 내니까. 다만 이들이 어떠한 논증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순 없다. 애초에 그건 예술의 소관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문학적인 설득 방식보다 논증을 통한 것에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존재하니 언급할 당위는 충분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얻는다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해 준 인물은 전후 시기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철학적 논증의 방식으로 사랑을 다룬다. 철학자 중에 사랑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고찰한 사람은 흔치 않다는 걸 고려하면, 확실히 특이한 부류다. 그가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제시하는 바는 인간에게 사랑은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 또 사랑은 자유라는 사실이다, 즉 필자가 이미 언급한 작품들과 통하면 면이 있다. 이하에서는 그의 철학 체계를 전반적으로 훑으며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그의 핵심 저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사랑의 기술』,『소유냐 존재냐』 세 가지다. 출판 순서도 적은 순서와 같다. 이 것들의 내용은 거진 겹친다. 하지만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고, 강조하고 상술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다. 에리히 프롬의 체계는 시간상으로, 중세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른다. 오늘날이란 에리히 프롬이 살아 철학 하던 오늘이기도 하지만, 그가 지적하던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이기도 하다.


 프롬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인류 사회가 충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분명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지향했고 그에 따라 발전해 왔다.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억압으로 가득하며, 다수의 사람은 스스로가 가진 자유를 반납하기에 이르렀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러한 사고는 나치등의 전체주의국가의 등장과 세계대전을 목도하며 발전해 온 것이다. 그는 추가적으로 자본주의와 나치즘은 억압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았다. 단지 방식이 얼마나 세련되었느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더 자유로운 시대가 왔건만, 왜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는가? 에 대한 물음에 심리학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써진 책이다. 프롬은 우선 중세 시대에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책을 개괄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종속된 채 살았다. 물론 그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란 언제나 자신의 계급에서 허용되는 한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즉 사람들은 자립하고 있다기보단 사회에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중세 시대의 종말은 유럽에 개인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수용되며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비로소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즉 자유를 얻었다, 바야흐로 계몽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흐름은 자유에 대한 추구였다. 프롬은 당시에 추구되던 자유가 소극적임을 지적한다. 소극적인 자유란 "~으로부터의 자유"다. 유럽인들은 “신분제로부터의 자유.”, “왕정제로부터의 자유.”, “가톨릭으로부터의 자유.” 따위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는 공허한 것이기도 했다. 이 공허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소극적인 자유란 어떠한 목적의식을 지녔다고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사회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은 사람들과 단절되었음도 의미했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타인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또 정해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방황할 필요가 없었고 심리적으론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으리라. 만일 현대인들이 누린 자유가 "~로의 자유"라는 형태의 적극적인 자유였다면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불안에 빠진 현대인들은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 방법이란 바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었고, 결과물은 세계대전이었다.


 이제 『사랑의 기술』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 보자. 이 책의 기본 명제는 "사람은 이성을 지닌 존재다."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필연적으로 단절에 대한 불안을 품을 수밖에 없다고 에리히 프롬은 주장한다. 단절되었다는 것은 이성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길 바라며, 사랑은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다. 『사랑의 기술』을 통해 프롬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착각에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소유욕으로, 또 자본주의적 교환 대상으로, 마지막으로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이하에서는 소유라고 표현하겠다- 그는 여러 모성애, 종교애등 많은 사랑들을 일별한다. 필자는 거기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를 강조하고 싶다. 프롬은 나치즘에 대한 정신분석적 연구를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관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 즉 지배하는 쪽은 보다 큰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전혀 다르다. 지배자는 피지배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피지배자는 새로운 지배자를 찾으면 될 뿐이다.


 프롬이 정의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 다르다. 타인의 개성을 수용하면서 발전을 돕는 태도다. 그의 관점에서 사랑은 자유이고, 주는 것이며, 연마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는 물론 사랑을 지향하고, 소유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소유를 지양해야 하는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소유욕은 연결 욕구를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진정한 사랑보다도 쉽다. 허나 소유는 사랑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호간의 자유를 제한하며 역으로 권태감을 증가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위에 지적한 지배자-피지배자간의 관계를 상기해보자. 즉 소유로 이어진 관계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며,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도 없다. 반면, 사랑은 상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며 인간의 실존적 욕구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을 해야하는 이유다.


 사랑의 이유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 부조리를 돌파하고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프롬은 사회의 발전은 단순히 물질이나 기술, 과학의 발전만으로는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성격 구조에서의 변화도 필수적이다.


 『소유냐 존재냐』는 개인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두 가지 양식에 대해 다룬다. -프롬이 생각하는 이상사회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나 중요하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하나는 소유하는 방식이고, 나머지는 대상의 존재 그 자체를 수용하는 자세이다. 후자의 것은 기실,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사랑과 같다. 소유 역시도 사랑의 반대편에 해당한다. 이것이 필자가 가짜 사랑을 소유라고 표현한 이유기도 하다. 소유로의 방식은 자본주의에 의해 더 심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소유란 개념은 자본주의체제 자본주의에선 옳다고 여겨진다. 이렇듯 자본주의외 소유는 상호연관되며 현실의 부조리를 심화시킨다.


 우리는 왜 사랑해야 하는가?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존재다.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에는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상호 간의 자유를 제한하며 근본적인 해결도 해주지 못한다. 반면 후자는 서로 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발전을 지원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며 사회적 부조리를 돌파할 수도 있다. 심지어 사랑은 노력을 통해 숙달될 수 있다. 즉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위해. 사회와 세상을 위해, 또 후손을 위해 사랑해야 한다.




 프롬이 천국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필자가 지나가듯 쓴 말이 있었다. 프롬이 지적한 사회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 말이다. 봉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분명 긍정적인 진보다. 프롬이 직접 언급했듯, 보통선거와 사유재산과 같은 역사적 성과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의 내부 비판도 꾸준히 진행되고. 수치적으로 볼 때 인류의 상황은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노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들의 단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자본주의사회가 끊임없이 사랑의 대체품을 제공한다고 비판한다. 대체품들은 우리가 타인과 연결되어있다고 착각하게 하거나, 일시적인 유희에 빠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사랑이 필요 없다고 여기거나, 거기에 써야 할 노력을 거둬들인다. 프롬이 살던 시대의 대체품들은 라디오나 티비쇼, 영화따위였다. 프롬의 동료인 아도르노는 대중소설 따위도 이에 속한다고 비판했다. 허나 이러한 매체들은 훨씬 대중적이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다 함께 거실에 모여 티비를 보았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것을 화재로 삼을 수 있었다. 티비쇼가 번성하던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경험을 하고, 서로를 공유할 수 있었다. 우리도 무한도전과 개그콘서트 따위로 이야기꽃을 피운 경험이 있다.


 프롬은 오늘 날의 대체품을 보면 경악하리라. 우리들은 이제 티비도 잘 보지 않는다. 대신 SNS따위나 유튜브 따위를 한다. 이런 모바일 시대의 대체품은 이전 시대의 대체품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심지어 사람들의 관심사가 점점 다양해짐에 따라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있다. 즉 사람들간의 유대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우리들은 점점 권태로워지고 있다.


 한때 진보적이었던 서구는 배타적인 정당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근 몇 년 사이에 각자도생적 사고방식이 확대되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이제는 개인들의 머리에 뿌리박은 것처럼 느껴진다. 상황이 여유롭지 않을 수록 상호 협력을 강화해야 생존에 유리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진 않다. 높은 자살률과 이혼율, 미연애자들의 비율 등은 사회적 안정감이 붕괴되었다는 사실. 또 서로 간의 유대감이 점점 상실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동시에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랑을 충분히 연마한 사람들의 숫자가 희박해지고 있음을 함의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길가나 지하철에서 본 아기한테 귀엽다고 하며 간식거리를 나눠주는 일이 흔했다. 가끔은 한 번씩 아이를 쓰다듬고 가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제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전진은 이렇듯 숫자가 써진 지면으로도, 피부에 닿는 체험의 차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훈련해야 한다. 프롬은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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